〈극락왕생〉, 우리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귀신, 을 그려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흑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자를 떠올릴 것이다. 귀신을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우리는 그 형상으로부터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현상이 연민할 만한 사연(‘한’)에서 생성되었다고 짐작한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라 할 수 있는 ‘한’은 여성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장 비천한 삶에 배어드는 정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대당한 여자들 외에도…

선미, 분열하는 디바

놀라운 소녀들의 역사 원더걸스는 다사다난했다. 2007년, 〈아이러니〉로 데뷔한 원더걸스는 반 년도 안돼 주목받는 멤버였던 현아를 떠나보낸다. 어수선한 가운데 유빈으로 현아의 자리를 대체한 원더걸스에게 〈Tell Me〉는 ‘로또’였다. 〈Tell Me〉 신드롬, 그리고 〈So Hot〉과 〈Nobody〉의 연이은 히트는 원더걸스의 명성을 ‘국민 그룹’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JYP 엔터테인먼트는 원더걸스의 커리어가 가장 빛나던 시기에 해외 진출이라는 악수를 둔다. 아마도 박진영의 숙원이었던…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3): 웹툰 〈남의 부인〉, 그 남자의 진짜 파트너는 누구인가

나만 바라봐 ‘친구 없는 남자’.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으로 친구 없는 남자를 꼽는 여자들을 왕왕 본 적 있다. 낮은 술자리 빈도, 퇴근하면 칼 같이 귀가, 괜히 바람이나 넣는 허풍선이들 차단, 나를 남자들 친목 모임에 끌고 나갈 일도 없는, 그토록 ‘가정적인’ 남자와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수월할 거라고 말이다. 여자들은 남자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한 덩어리로 반죽하는 꿈을 꾸는…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2): 〈유전〉, 가부장제 컬트

* 이 글에는 영화 〈유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재현할 수 없는 것 애니(토니 콜레트 분)는 아들 피터가 못미덥다. 친구네 하우스 파티에 다녀오겠다고 차를 빌려 달란다. 피터가 술을 마실 것 같다고 걱정하던 애니는 찰리를 딸려 보낸다. 챙겨야 할 여동생이 있으면 나을까 싶었다. 하지만 열 여섯 피터는 너무 어리다. 그는 기어코 찰리를 떼어 놓는다. 열 세 살 찰리는…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1): 〈툴리〉, 육아 외주 공포

셋째가 제일 쉽다고? 영화 〈툴리〉의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기진맥진하다. 윤기 없이 마른 금발은 세어버린 백발처럼 보이고, 충혈된 눈자위에 눈동자마저 빛 바랜 듯 엷은 하늘색을 띤다. 후 불면 재가 되어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마를로는 출산을 앞두고 있다. 계획하지 않은 아이였다. 그는 이미 딸 사라와 아들 조나를 등교시키는 아침마다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춘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0): 들어가며

  얼마 전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를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72년에 가족사회학자 제시 버나드가 했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결혼은 여성의 건강에 유해할 수 있다.” (…) 이런 연구에서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보다 우울증이 20퍼센트 더 많이 발병하고 중증 신경증은 세 배 더 많이 나타낸다. 신경쇠약, 신경과민, 심계항진, 무력감도 기혼 여성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

책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가 나옵니다

  제가 쓴 책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여성 서사 웹툰 읽기」의 출간이 임박했습니다. 2017년에 썼던 웹툰 리뷰 ‘괴물이 된 여자들: 만화 속 ‘성형 미인’과 루키즘(http://taengal.com/archives/171)’과 ‘덴마 8년: 양영순의 여성관은 발전하고 있을까(http://taengal.com/archives/157)’ 이후 출판사 산디에서 웹툰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출간을 제안받아 시작한 프로젝트고요. 2018년 7월부터 글을 쓰고 엎기를 거듭하면서 2019년 5월에 마침내 모든 원고를…

「어제가 오면(See You Yesterday)」의 결말이 열려야 하는 이유

  지난 달엔가, 트위터에서 우연히 본 영상을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미국 쇼핑몰 주차장에서 행인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장면이었다. 경찰은 든 것을 모두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총성이 터질 것 같은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상대편에서는 한 흑인 여성의 절규가 들려왔다. 아이를 안고 있다고 말이다. 경찰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같은 명령을…

여성의 아동화, 아동의 여성화, 아동-여성이라는 새로운 신체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내가 키워진 방식을 떠올리면서, 날로 실감하는 것이 있다. 여성혐오와 아동혐오는 닮았다. 그러니까,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성인이 아동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남자들이 종종 여성의 부정을 긍정의 회피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어떤 어른들은 아동의 거부 의사를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는다. 아이가 씩씩대고 울 때까지 약을 올리는 어른들의 즐거운 얼굴은 나를…

빻은 유아동 콘텐츠에 지친 당신을 위한 그림책 추천

  며칠 전 케이마트(호주의 대형 잡화 마트)를 배회하다가 이상한 물건을 봤다. 「여자는 방귀 안 껴, 알겠니!!(Girls Don’t Fart Okay!!)」라는 어린이용 그림책이었다. 불길한 직감에 이끌리며 책을 후루룩 살펴봤다. 주인공은 남자아이다. 그 앞에 여자 요정이 나타나 “여자는 방귀를 끼지 않는다”고 우긴다. “여자의 몸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주인공은 그의 동성 친구들과 함께 사실 여부를 확인하러 떠난다. 여러가지…

일 년만에

  5일만 더 지났으면 블로그 이사하고 정확히 일 년 만에 쓰는 글이 될 뻔했다. 왜 일 년동안 아무런 활동도 없었냐면, 이전 블로그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내가 그곳을 버려둔 사이 들어와 있던 출간 제의를 발견했고 그렇게 책을 쓰기 시작해 완성하기까지 일 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기존에 있던 글을 모은 것도 아니고, 내가 매우 느리게 쓰기도 하고, 한…

블로그를 옮기며

  임신을 발견한 직후 호주로 이주하기까지 정확히 3개월이 걸렸다. 평생 익힌 재주라고는 글 쓰기밖에 없는데, 영어 모국어 화자가 아닌 내가 현지에서 ‘무엇을 쓰는 사람’으로서 커리어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작은 것이나마 기록해보자는 막막한 심정으로 티스토리에서 블로그를 열었다. 한국 업체로부터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바이럴 블로그가 될 수는 없겠지만, 구글 광고 정도는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사라져야 사는 여자들(1): 사건의 재구성

  연애하며 작아지기 남자들이 잘난 여자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나는 연애라는 친밀한 관계를 통해 본심을 엿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시 나에겐 서울 소재의 대학생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타이틀도 없었는데, 나와의 학력 차이가 큰 남자들은 나의 존재를 도저히 못견뎌하는 듯 했다. 세상에는 (비꼬는 의미로) “가방끈 길어서 좋겠다”, “너는 네가 잘난 줄 알지”, “네가 하는 공부는 쓰레기고…

여자의 유통기한에 관하여: 아재와 미소녀의 불유쾌한 만남

와인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유우-머에 그렇게들 박수를 쳐댔더랬다. 여자가 불티나게 팔리는 나이는 스물 셋 넷, 제값을 받을 수 있는 마지노선은 스물다섯, 스물여섯은 땡처리, 스물일곱부터는 폐기처분이라는 뜻이었다. 서른이면 ‘상폐녀(상장폐지녀)’라고도 했다. 대중 일반의 공감을 등에 업고 포장지만 바꿔가며 신나게 유포되어 온 메시지 “팔릴 때 좋은 남자 잡아라(시집가라)”는 농담을 가장한 브레인워싱이었다.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들자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