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씨가 놓친 네 가지

‘삼포세대’라는 말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 2011년이었다. 6년 간 삶은 더 어려워진 듯하다. ‘우리는 왜 연애/결혼/출산을 하지 못하는가?’라는 신세 한탄은 ‘우리가 왜 연애/결혼/출산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정말로 연애/결혼/출산을 원하는가? 이전에는 조건이 따라주지 않아 우러러만 보던 삶의 목표들이 강요된 가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확산되면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시작했다. 그래서 2017년의 이삼십대는 포기보다 ‘거부’가 어울리는 세대가 됐다. 애초에 추구하지 않는 바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중에서도 출산은 가장 급진적인 재사유가 일어나고 있는 분야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이 헬조선에 또 새끼를 치라니! 그뿐인가. ‘성스러운 행위’라는 베일 뒤에 감춰져 있던 출산의 민얼굴과 현실적 장벽들, 즉, 출산 과정, 출산 후유증, 과중한 육아 노동, 경력 단절 등에 관한 경험담이 활발하게 공유되면서 저출산-무출산 경향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됐다. 이 와중에 정부는 끈질기게 국가 관점에서 기획한 출산장려 캠페인으로 국민을 압박하며 눈총을 사는가 싶더니, 끝끝내 ‘출산지도’라는 괴물을 탄생시킴으로써 임신/출산 당사자들의 격노를 사기에 이른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소동이었다.

 

여기에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아내 김정숙 씨가 꺼지지 않은 불씨를 다시 지폈다. 지난 16일 김 씨가 언론사 여기자들을 초대한 만찬 자리에서 언급한 저출산 해결 방안이 화근이었다. 김정숙 씨는 ‘인류가 번성하는 기반’이라는 데서 출산율 증가의 정당성을 찾으며 엄마는 ‘젖을 물리는’ 육체적 교류를 통해서만 아이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과 키운 정을 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경제활동 욕구에 사로잡혀 보육을 국가에 떠맡기려 하는데, 국가에서 제공한 누리과정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육아 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모성이 적극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주변에서는 이 내용을 듣고 분노하지 않는 여성을 보지 못했다. 이 분노는 차기 대통령 후보와 가장 긴밀하게 사상을 공유하고 있을 인물이 시할머니(요즘은 시어머니 세대도 저런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에게서나 들을 법한 전근대적 여성관/출산관/양육관을 시인한 데서 온 절망이기도 했다. 김 씨의 담화는 각계각층에서 제 자리를 찾으려 분투 중인 여성들의 다양성을 모성이라는 가치 아래 뭉뚱그리고 복속시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말 한마디마다 여지없이 드러나는 나이브한 태도는 많은 유권자를 상심케 했다.

 

1. 출산은 인류 번영 혹은 인구 증가의 수단이 아니다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새 정부는 출산을 ‘대한민국의 미래’ 혹은 ‘인류 번영’을 위해 성취해야 할 당위적 과제로 내세우는 새마을 운동식 출산 장려 전략을 수정하길 바란다. 농경사회에서야 최대한 많이 낳아 온 가족이 밭일에 매달리고 첫째가 넷째를 키우고 셋째가 막내를 키우고 배고프면 마당의 흙도 먹고 약주 하신 아버지에게 조금 맞기도하고 8남매 중 한둘은 죽어 나가도 그것이 그른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이 계몽된 사회, 피임법이 보급되었고, 위생적이며, 인권과 평등이 보편적 가치로 공유되고, 교육/경험 수준이 계급을 결정하는 사회, 자본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재화의 스펙트럼이 극단적으로 확대된 사회에서는 가족계획이 필요하다.

 

국가는 점점 부자가 되는데 국민은 점점 가난해지는 기형적 사회에서 국가 번영을 위해 출산하라는 메시지는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2년을 백수로 몸부림치고 취업 바늘구멍을 뚫으면 세전 월급 150만 원으로 입에 풀칠하는 세대는 이 가난과 불평등의 굴레를 자기 대에서 종식시키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반-출산 정서를 진정시키고 싶다면 정부는 실체 없는 모성애, 애국주의, 인류애 서사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출산/육아=삶의 질 하락’이라는 연상 작용의 고리부터 끊어야 한다. 이는 강력하고 실용적인 육아 지원으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2.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

 

양육 의무를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김정숙 씨의 육아관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육아노동의 공평한 분배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나 조부모 등이 주 양육자로 활약하는 가정에 대한 편견마저 재생산한다. 또한, 모성을 여성이 응당 지녀야 할 천부적 자질 취급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엄마들이 ‘사회에서 학습된 모성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나쁜 엄마’라고 자책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모성이 본능이라는 주장은 모성 없는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여성은 적당히 살다가 나이 차면 아기도 두셋쯤 낳고 양육에 헌신하는 인큐베이터가 아니다. 여성은 가치관에 따라 출산/비출산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 인격체이며, 그들 삶에는 아기 키우는 기쁨 외에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자아실현을 위해, 현실적으로는 자기 몫의 수입을 목표로 직업 활동 및 대외 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경제력과 발언권이 비례하는 가정 내 위계서열에서 전업주부 여성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고려하자).

 

여성이 육아와 커리어 사이에서 일생일대의 선택을 강요받는 것은 우리가 그 두 가치를 양립할 수 없게 설정해놓은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육아 및 봉양 노동으로 사회 복지 비용을 절감해온 한국 같은 국가에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마저 직무를 유기한 엄마가 내팽개친 아이들을 몰아놓은 곳쯤으로 취급하면 정말로 곤란하다. 우리는 육아와 커리어의 양자택일적 관계를 해결할 방안을 고민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회 시스템과 인식 개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성과 남성이 공평하게 육아를 분담하고 국가의 적절한 서비스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인구 증가의 꿈을 포기하면 될 일이다.

 

3. 모유 수유는 선택이다

 

막 출산한 산모에게 모유 수유는 아주 고된 과업이다. 찢어진 회음부가 아무는 데 적어도 이삼 주, 오로가 약 한 달간 쏟아져 나오며, 출산과 모유 수유가 탈수를 야기해 경우에 따라서는 앉기조차 힘들 만큼 심각한 변비를 동반하는데, 초 신생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는다. 수유부는 맵거나 기름진 음식을 가려 먹고 젖을 잘 돌게 하는 음식은 찾아 먹어야 하며, 기분이 울적하거나 괴로울 때도 커피 한 잔, 술 한 잔, 담배 한 대 찾을 수 없다. 젖을 잘못 물리면 염증이 생기는데 눈물이 쏙 빠지게 아파서 칼로 가슴을 쑤시는 고통에 비유된다. 평온하게 아기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은 반 정도 환상이다. 그들은 때때로 보초병처럼 선잠을 자며, 아픔을 견디려 이를 악물고 모유 수유를 한다. 그것도 몇 주씩이나 말이다.

 

김정숙 씨의 발언은 여성 신체의 다양성을 무시한다는 점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출산과 동시에 바로 젖이 나오는 여성도 있지만, 젖이 돌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며칠 동안 빈 젖만 물리거나 수유를 조금 했더니 젖이 저절로 말라버리는 케이스도 숱하다. ‘엄마가 젖을 물리며 아기와 육체적으로 교류해야 사랑과 책임감이 생긴다’는 사고방식은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할 수 없는 여성에게 죄책감 또는 소외감을 유발한다.

 

모든 엄마는 행복하게 아기를 키우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양육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던 시절에나 일제히 모유 수유를 하고 도저히 안되면 젖동냥이라도 했겠지만, 분유라는 대안이 존재하는데도 무조건 ‘엄마의 의무’라고 떠넘기기엔 모유 수유는 너무나 가혹한 과제다. 괴롭거나, 거부감이 들거나, 고통스럽거나,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거나, 여성은 어떤 이유로도 모유 수유를 중단할 수 있다. 남편, 친정, 어머니, 시누이까지 거들며 분유 먹이면 모유 먹이라는 말 듣고, 모유 먹이면 분유 먹이라는 참견을 듣는 게 수유 문제다. 여기다 대선 후보 아내까지 숟가락을 얹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4. 국가 차원에서의 육아 지원 확대는 범국민적 요구다

 

김정숙 씨는 밑도 끝도 없이 ‘여자 페미니스트’를 지목함으로써 국가 복지 확대 요구를 마치 급진적 운동성을 지닌 일부 단체의 주장이나 되는 양 취급했으나, 실질적으로 육아 지원의 도움을 받는 집단은 ‘페미니즘 사상을 가진 여성’만이 아니다. 맞벌이하는 부부, 육아 노동에 지친 주 양육자, 황혼 육아에 매달리는 중장년층, 경제적/환경적 이유로 가정에서 부족한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 모두 규격화되고 전문화된 복지 서비스를 통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여자 페미니스트’라는 그루핑 자체부터가 논리적 결함을 수반하는데, 직장 여성은 페미니스트와 등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위와 같은 요구는 남성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페미니즘 개념과 양육 실태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여자 페미니스트’라는 워딩을 동원한 김정숙 씨의 경솔함에 유감을 표한다.

 

종합해보면 김정숙 씨는 ‘여성이 주 양육자로서 제 자리를 찾아 노오오오오오력하면 출산율과 보육 복지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한 셈인데, 기사를 접한 시민의 반감이 높자 20일 캠프 측을 통해 와전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자들이 녹취 없이 기억에 의존해 인용문을 쓰는 일은 아주 드물고, 특히 거친 구어체로 쓰인 문장을 봤을 때 기사에 게재된 내용은 김정숙 씨의 실제 발언 그대로일 것이다. 다만 문재인 전 대표가 중요한 국면에 있는 만큼 발언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수습에 나선 정황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여성 유권자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립서비스건, 구태의연한 관념을 깨는 기회가 되었건, 정말로 ‘오해’ 였건, 이번 홍역이 캠프에는 여성 유권자들의 열망에 한 번이라도 더 귀 기울이는 계기로 작용했기를 바란다. 나는 반기문과 문재인이 함께 대선에 출마한다면 문재인에게 표를 던질 사람이고, 그런 이유로 문재인 캠프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수정 요청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바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가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더 귀 기울이고, 부조리한 사회를 더 많이 바로잡을 수 있는 대통령을 찾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문재인 전 대표 역시 소수자 인권과 복지 이슈에 더욱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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