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 8년: 양영순의 여성관은 발전하고 있을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더우먼>과 <악녀>의 극장가 개봉은 참으로 시기적절하다. 여성 감독 패티 젠킨스가 메가폰을 잡고 갤 가돗이 주연한 여성 히어로 영화, 김옥빈이 쌍검과 도끼를 휘두르며 강도 높은 무술 연기를 소화하는 여성 원톱 액션 영화에는 보장되는 수요층이 있다. 바로 여성 관객이다. 주류 영화계는 여성 배우에게 아주 자그마한 자리만을 허락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사랑스러운 히로인으로, 한국식 느와르의 성녀 혹은 악녀(팜므파탈)로, 여성 캐릭터가 제한적 바운더리를 공회전하는 동안 남성 캐릭터들은 수없이 많은 서사를 써 내려갔다. 대중매체는 ‘사건을 주도하는 강인한 여성 롤모델’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는가? 어린 시절 즐겨보던 만화영화의 공주님들은 왕자님 중심의 구원 서사에 기대고 있었다. 모험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어땠나. 긴박한 순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일행의 발목을 잡는 존재, 과도한 인류애로 악인을 용서하려다 더 큰 갈등을 부르는 존재, 나도 모르게 “아, 쫌!”을 외치게 만드는 팔불출이 아니었던가.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소년 만화의 세계에서도 여성은 병풍 이상의 무언가를 해내지 못했다. 호색한 김전일의 썸녀 미유키, 강백호의 일편단심 구애를 받는 채소연, 초반 <드래곤볼>의 부르마, <란마 1/2>의 세나, <상남2인조>와 <반항하지마>의 영길이가 찾아 헤매는 여자들이 그랬다. 히어로물, 모험물, 배틀물은 남성적인 장르로 전유되었고, 소년 캐릭터가 도장 깨기를 통해 ‘멋진 놈’ 혹은 ‘강한 놈’으로서의 자아를 숙성시키는 동안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사춘기적 성장 과정에 딸린 부록으로 머무른다. 굳이 따지자면 세일러복을 개량한 미니스커트-하이힐 전투복에 요술봉을 든 미소녀가 우아하게 악당을 무찌르는 <세일러문>, <웨딩피치>, <천사소녀 네티> 등의 변신소녀물이 여성 전투력의 평균치였을 것이다. 정식 갑옷을 장착한 마법사 리나가 파티를 이끄는 <슬레이어즈> 정도가 그나마 진보적인 작품이라 하겠는데, 리나 역시 백치 검사 가우리(카우링)의 보호를 받으며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최근 1,000화의 고지를 넘어선 <덴마>는 만화가 양영순이 2010년부터 네이버 웹툰에 연재해온 SF 모험 만화다. 탄탄한 인체 기본기 위에 독자적 작화를 구축한 그림쟁이, 단순한 표현에 감정을 탁월하게 압축시키는 연출가, 동서양 신화와 종교를 재구성해 유니버스를 창조하는 스토리텔러인 양영순은 안타깝게도 연재 작가로서의 성실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1001>, <삼반이조>, <란의 공식>, <라미레코드>, <플루타크 영웅전> 등 대작이 ‘될 뻔한’ 만화들을 줄줄이 연재 중단시키고 작가 신뢰도가 곤두박질쳤던 바로 그 시점에, 양영순은 심기일전해 <덴마>라는 카드를 꺼냈지만 역시 상습 지각으로 독자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호흡이 짧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재되던 <덴마>가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분기점은 에피소드 ‘God’s Lover’였다. 물리적 오류로 인해 초능력 종족 ‘퀑’이 발생하고, 퀑 개개인의 유전적 요인과 트라우마적 사념이 고유의 특수기술로 발현된다는 기본 아이디어는 <덴마>에 배틀물적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작가가 뿌렸던 복선들을 거두고 설정을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이 세계관에서는 초능력자들조차 한낱 장기말이었음이 드러난다. 우주적 단위의 음모를 계획하는 종교단체 ‘태모신교’, 파국을 미리 보고 미래를 바꾸려는 예지 종족 ‘데바림’, 태모신교를 견제하며 패권을 놓고 다투는 귀족 가문(‘고산’ 가문과 ‘엘’ 가문)의 두뇌 싸움으로 확장된 <덴마>의 스토리 퀄리티는 독자들의 추리력을 자극하며 코어 팬층을 견인했다. 그러나 퀑들이 행성을 이동하며 수없이 썰고 썰려나가는 와중에도 전투형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은 미미하기만 했다. 이 멋지고 광활한 세계에 여성 퀑이 없다니! 8우주의 물리적 오류는 남성에게만 발생한단 말인가! 

<아색기가> 일부

<덴마>의 연재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면 양영순의 완결 대표작은 <누들누드>와 <아색기가>로 남을 뻔했으니 애초에 기대할 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양영순을 스타 작가로 만든 장르는 성인 만화였다. 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골반을 가진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미녀와 볼품없는 외형의 마당쇠형 추남이 결합하는 양영순식 성인 만화는 사실상 헤테로 포르노의 문법을 답습하고 있었다. 의도적인 남성의 익명화, 필부(匹夫) 화는 남성의 인격적 존재감을 제거하고 관전자를 시선으로 참여시켜 여체 욕망에 최적화된 환경을 조성한다. 여성을 도구화 및 대상화하는 고질적 태도는 <덴마>에도 반영된다. 단일 초능력을 발휘하는 퀑, 복합 기술을 사용하는 하이퍼 퀑, ‘게오르그 증폭 실험’의 결과로 탄생한 돌연변이 퀑, 인공적인 시술로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린 강화 퀑까지 등장하고, 이 능력치 인플레이션 속에서 ‘질량등가치환’이라는 특수 기술(질량을 기반으로 물체와 물체를 원격 교환하는 기술)을 선보였던 덴마가 최약체라는 비웃음을 살 때까지, <덴마>의 여성 인물들은 수녀, 메이드, 종업원, 무녀, 창녀, 좀도둑, 어머니, 여동생이라는 직업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악녀, 성녀, 소시민으로 삼분화된 여성

가이린

본체에서 추출한 의식 체계를 더미에 이식하는 ‘메이팅’ 시술을 당한 후 퀑 택배회사 ‘실버퀵’에 노예계약으로 저당 잡힌 주인공 ‘덴마(다이크)’에게 ‘가이린’은 탈출 동기를 부여한다. 가이린은 매머독 하렘의 무희 출신으로, 엘 가문에 대항하는 ‘늑대굴’의 핵심 멤버 ‘하아켄’의 딸이자 다이크의 본체가 기억하는 마지막 연인이다. 덴마는 노예 시장을 통해 엘의 정부가 된 가이린을 구출하겠다는 목표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만, 퀑 사냥꾼 ‘가알’에게서 입수한 기록물을 통해 가이린이 “다이크 사냥에는 관심 없다”, “다이크를 믿지 않는다”고 발언하며 엘의 노예를 자청한 사실이 밝혀진다. 다이크를 배반하고 엘에게 정신적・육체적 위안을 제공하는 동시에 엘의 친자 ‘카인’과도 관계를 맺는 가이린의 팜므파탈적 존재는 주인공이 밝혀내야 할 수수께끼로 기능한다. 1대 고산 공작이 총애하는 아그네스 데바(태모신교의 수석무녀)도 마찬가지다. 생계가 어려운 소녀들을 무녀로 육성해 귀족 패트론에게 파견시키는 태모신교의 성매매 사업에서 무녀는 볼모 신세가 되어 종단과 귀족의 이해 관계를 강화한다. 고산 외 인물들에게 “소녀의 탈을 쓴 악마 계집” “야심 많은 살인광”으로 묘사되는 아그네스가 행성 아오리카의 패왕 패거리에 납치 및 강간당한 사건은 궁극적으로 고산이 지닌 순정의 크기를 증명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고산은 보복을 위해 비밀 사설 경호대 ‘백경대’의 화력을 총동원해 아오리카를 초토화하고 이를 계기로 암살당하지만, 아그네스는 공작의 파멸 후 종단 주교 자리에 오르며 야심을 달성한 권력형 인물로 그려진다(아그네스의 외눈은 권력 쟁취 과정에서 벌어진 혈투를 암시한다). 

 

이델과 넬

에피소드 ‘식스틴’과 ‘God’s Lover’에서는 남성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남성의 조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성녀 스테레오타입이 동원된다. “50kg이 넘는 여성은 몬스터”라는 여성 혐오적 대사로 남성 독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식스틴’에서 이델 사제의 짝사랑을 받는 데바 ‘넬’은 우주 여군이 꿈이었으나 가족 부양을 위해 태모신교에 입단한 인물이다. 주교의 판단으로 귀족들의 성노예로 봉사하게 된 넬은 악명 높은 변태성욕자 호르마에게 폭력적으로 강간당함으로써 이델의 공격성을 각성시킨다. 에이즈와 비견할 만한 우주 역병 보인자가 된 넬은 대공습 지역의 봉사 인원으로 파견되는 등 각종 고초를 겪고 가사상태에 빠진 뒤에는 위성 마요크의 소각로에 버려진다. 매일 5만 명의 우주 역병 환자들이 쏟아지는 소각로에서 목숨을 걸고 넬을 구출해낸 이델은 ‘평면 구속’ 기술을 사용해 넬을 2차원 세계에 봉인한 뒤 자신의 몸에 각인한다. 한편, ‘God’s Lover’의 주인공 고드는 행성 벨라의 행정네트워크 통합 계획 개발자이자 엔젤타운의 리더로 괴팍한 심성을 가졌으나, ‘메이’를 만나면서 헌신적인 사랑의 투사로 거듭나는 인물이다. 근무 태만과 통제권 남용으로 통치위원회의 눈 밖에 난 고드는 메이팅 생체 실험 모르모트로 전락하지만, 끝없는 탈출 시도 끝에 기지를 발휘해 행성 관리 네트워크 더미로 부활한다. 행정 시스템과 기후까지 통제할 가능한 절대자적 능력을 획득하게 된 고드는 자신의 권한을 오직 메이를 수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메이는 고드의 도움을 받아 전에 없던 부를 획득하고, 귀족 가문의 좋은 남자와 결혼에 성공해 신분을 상승시킴으로써 ‘행복’을 달성한다.

가알의 여동생 한나

이 순결한 성녀 캐릭터에서 신성화를 걷어낸 소시민적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헌신적인 조력자로서 남성의 구원으로 보상받는다. 5인조 퀑 사냥꾼 조직 ‘펜타곤’ 멤버 중 한 명인 가알의 여동생 한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에피소드 ‘사보이 가알’). 이 고아 남매의 비극은 보육원에서 시작된다. 가알이 한나를 성추행한 원장을 공격했다가 감금당한 사이 보육원에 화재가 발생하고, 한나는 가알을 구출하기 위해 불길에 뛰어들었다가 전신 화상을 입은 것이다. 무의식이 억압하고 있던 이 기억이 되살아났을 때, 한나를 향한 가알의 부채의식은 필사적으로 생존해야 할 이유가 된다. 다정하고 상냥하며 요리 실력이 좋지만, 추한 외모와 악취로 천대받던 한나의 삶은 가알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넘긴 재산을 수령하면서 극복된다. 에피소드는 피부를 성형해 미형의 외모를 되찾은 한나가 대학생이 되어 남자친구를 동반하고 나타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에피소드 ‘The knight’에도 주인공 ‘지로’ 때문에 고통받는 가족들이 등장한다. 악당 규오의 꾀에 넘어가 마약중독에 빠진 지로는 좀도둑질로 연명하고, 지로의 뺑소니 실수로 불구가 된 남동생 역시 마약에 중독되면서 가족의 생존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책임지게 된다.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는 지로에게 당하는 수모를 참아 넘기고 지로가 저지른 어떤 악행도 용서하는 모성애적 인물인 한편, 여동생은 몸을 팔아 생계를 마련하는 창녀 여성으로 지로를 원망하면서 어머니와 갈등을 빚는다. 양영순은 가족 구성원들의 불행을 끈질기게 전시하면서 지로가 8우주 최고의 퀑으로 각성해야 할 동기를 마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로를 마약 중독에서 극복시킨 결정적 계기는 가족들이 감내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이 아니라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당시’의 행복했던 기억이다. 이로써 마약의 유혹을 이겨낸 지로는 백경대 계약금으로 가족을 비참한 삶에서 구제하고 가장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가야

최초의 여성 퀑: 가야 

전쟁 소설이나 전쟁 영화의 세계관을 내면화한 <덴마>의 유니버스에서 여성의 신체는 무자비한 약탈의 대상이 된다. 남성의 비호를 통해서만 생존을 담보 받는 여성들을 비집고 나온 최초의 자립형 캐릭터는 ‘가야’였다. 2013년 첫 등장 당시만 해도 가야는 ‘롯’과 선후배 관계에 있는 백경대 소속 퀑으로 단역 비중만을 차지했다. 이후 고산 2세의 구 백경대 물갈이에 불만을 품은 롯과 함께 엘가의 경호대로 이적했고, 후기 에피소드인 ‘콴의 냉장고’에 이르러서야 롯의 연인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가야의 성격과 능력치가 구체화된다. 괴물 퀑 ‘헤글러’에게 사지를 절단당하고 사망 직전에 이른 롯을 소생시킨 가야는 회복 기술을 주로 사용하는 힐러이자, 전사체(퀑의 물리적 오류를 복구하려는 자연계의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퀑의 천적)를 소환 및 컨트롤할 수 있는 딜러다. 전 동료인 다니엘에게 “마음만 먹으면 우주 최강이 될 수 있으나” “시시한 연애 따위에 목매는” 퀑이라는 평가를 받는 가야는 잠재력을 가졌으나 연인의 보조 역할에 머무르는 순응적 인물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신 백경대와 전투를 벌이다 헤글러에게 살해당하는 최후에서 가야의 임신은 독자들의 기대심리를 무너뜨리고 비극감을 고조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가야의 죽음을 목격한 롯은 1대 고산을 향해 간직하고 있던 심정적 의지를 마침내 단절한다.

최강의 여성 퀑: 공자

‘콴의 냉장고’ 후속 에피소드인 ‘The Knight’의 중심인물 ‘공자’는 가야의 죽음이 남긴 씁쓸한 뒷맛을 씻어준다. 평의회가 비공식적으로 진행해 온 게오르그 증폭 실험(인위적인 퀑 능력 증강 실험)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극한 단계의 실험 성공으로 무시무시하게 커진 전사체를 끌고 탈출한 공자는 퀑 트레이너 ‘주완’도 인정하는 8우주 최강의 퀑이다. 데바림인 콴 영감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롯 등 걸출한 하이퍼 퀑 제자들을 배출했고, 귀족에 봉사하기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적 단체 ‘블랭크’에 소속되었다가 재야에 은둔하고 있던 공자는 ‘콴의 냉장고’를 계기로 사건에 휘말린다.

평의회의 끈질긴 추적과 계좌 압류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품위를 지키려 하고, 물질보다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며, 남색에 무관심하고, 제자들을 아량으로 품는 공자는 미형의 캐릭터이면서도 강자들의 경외감을 산다. 책사 ‘놉’과의 첫 만남에서 “매력적이십니다”라는 칭찬에 “그건 외모 평가질 할 때나 쓰는 말 아닌가?”라고 무안을 주는 공자에게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었다. 블랭크들의 공자 암살 모의 장면은 출중한 여성을 평가절하하는 남초 사회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왜(암살해야 하는데)? 예쁘고 몸매도 훌륭한데?”, “내 데이트 신청도 거절했어. 정말 나쁜 년이야!”, “골반이 훌륭하다”, “싱글에다 얼굴도 예쁘다” 등 공자를 짝짓기 대상으로 평가하는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 “두려워서야! (공자를 조직에) 안 받아줬다는 이유로 틀어지면 정말 골치 아플 거니까! 친구로 두면 안전해지는 거잖아!”라고 소리치자 다른 남성 블랭크가 “창피한 기억 들추지 말라”고 딴지를 놓는 대화의 흐름은 조직 내 여성이 언제나 성애적 시선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 성애화가 강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와 질투를 해소하는 수단임을 드러낸다.

억압적 환경 속에서 공자는 더 멋지고 강한 남성이 아닌 여성 파트너 ‘샵(샤)’을 선택함으로써 남성의 욕망 구조를 탈피한다. 평의회에서 문제적 퀑들을 처리하기 위해 조직한 ‘헬맨’ 소속인 샵 역시 남성 부하들을 거침없이 거느리며 냉정함과 판단력을 발휘하는 리더형 캐릭터다. 공자와 적으로 만난 순간부터 은근한 플러팅을 주고받던 샵은 평의회의 비리를 발견했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버려진 뒤 공자 무리에 합류한다. 이후 엘의 아지트로 들어가는 시점부터 공자의 비중은 현격이 줄어든다. 전투 퀑보다는 성인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제한적인 경호 활동만을 담당하게 된 공자는 샵과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서 레즈비언 커플을 묘사하는 양영순의 태도가 남성 중심적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될 만하다. <덴마>의 기저에 흐르는 호모포빅한 유머 코드와 상반되게도, 공자와 샵의 ‘예쁜 여자x예쁜 여자’ 조합은 우호적 태도를 가장한 남성들 특유의 ‘백합물’ 판타지에 봉사한다.

가우스

매지컬과 피지컬을 겸비한 여성 퀑: 가우스 

공자와는 달리 야성적인 용모를 가진 근육질 여성으로 묘사되는 가우스는 콴 영감의 제자이자 공자의 선배로, 여전히 블랭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8우주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공자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전사체 소환 및 컨트롤이 가능한 하이퍼 퀑이자 신체 단련을 통해 물리 전투에도 강점을 보이는 괴력의 소유자다. 블랭크 공격 이슈로 공자를 제거할 명분을 획득한 가우스는 호시탐탐 공자를 노리지만, 공자가 게오르그 파장 조절로 퀑 능력을 소실하자 정정당당한 대결을 위해 공격을 중단하는 의리와 양심을 가지고 있다. 샵이 헬맨 능력을 박탈당하기 직전에 전사체를 최대화하는 기회를 얻어 명실상부 8우주 최강의 퀑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일선에서 물러난 공자를 대신해 8우주의 새 질서를 만드는 네 개의 방패(롯-가우스-지로-다이크) 중 한 축을 맡게 되는 유일한 여성이다.

테이

‘늑대굴’의 강인한 수장: 테이 

가이린을 만나기 전 다이크와 연인 관계에 있던 인물로, 엘가 반동 세력인 테러 단체 ‘늑대굴’의 수장을 맡고 있으면서 평소에는 태모신교 평신도 성가대 지휘자로 가장한다. 늑대굴이 엘가의 경호대인 ‘붉은 늑대’와 적대하는 관계로 첩보 목적을 띠고 붉은 늑대 멤버 ‘살라이’에게 접근했다가 살라이의 친구인 다이크와 맺어진다. 이후 다이크가 붉은 늑대에 입단하면서 예정된 갈등은 다이크가 늑대굴 수장 명단을 입수하면서 가시화된다. 다이크가 붉은 늑대로부터 테이를 보호하기 위해 테이의 이름이 제거된 사본을 만들고 도피를 종용하는 등 유약하고 감정적인 면모를 보이는 데 반해, 테이는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며 신념과 대의를 지키는 리더형 인물로 그려진다. 명단 유출과 관련한 늑대굴 대책 회의에서 남성 수장들을 압도하는 책임감, 판단력, 추진력,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붉은 늑대와의 전면전에 대비해 태모신교를 개입시키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시 및 실행하는 능력을 갖췄다. 미녀형 여성(가야, 공자, 샵, 나즈레)과 추녀형 여성(가우스 및 기타 개그 캐릭터들)의 이분법을 벗어나 소박하고 평범한 용모를 갖고 있다.

열거된 인물들 외에도 데바림에서 ‘아론’ 영감의 역할을 ‘나즈레’가 이어받고, 놉의 애인 ‘바질’이 배후에서 물질적 서포트와 조언을 제공하는 등 여성 캐릭터들은 <덴마>에서 조금씩 파이를 늘려가고 있다. 8년의 연재 기간 등장한 수많은 남성 등장인물과 이름 없는 퀑들까지 포함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주도적으로 길을 개척하는 여성들이 두드러지는 최근의 경향은 긍정적인 신호를 읽힌다. 그 자리가 괴물처럼 우월한 여성에게만 허용된다는 사실이 남성 사회의 유리천장을 연상시킬지언정, 여캐의 몸매와 얼굴을 품평하고 누드 신을 서비스 컷으로 요구하는 댓글 일색이던 <덴마>를 생각하면 유의미한 변화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양영순이 1995년 데뷔해 20년 넘도록 만화를 생업으로 유지하면서도 낡지 않은 감각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기민함 덕분이었다. 공자의 등장을 기준 삼아 에피소드 ‘The knight’이 시작된 시기가 2016년 1월이고, <덴마>의 채색 담당 홍승희 작가가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를 이유로 비난받은 사건 시기가 2016년 8월이다. 홍 작가와 관련해 페이스북에 ‘메갈리아와 낙인찍기’ 기사를 공유함으로써 성난 독자들을 설득하려던 양 작가의 시도는 사과문을 게시하는 촌극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덴마>의 작은 변화들이 작가 주도 하에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만화의 생명력을 연장시킬 것이다. 여성 영웅이나 여성 능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소년 만화의 세계관에 의문을 품는 여성 독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욱 더, 많은 여성을 원한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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