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보다 임산부: 임산부 취급을 위한 다섯 가지 주의사항

 

지하철 선반 위쪽을 올려다보면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세요, 아기가 고마워해요”. 임산부 배려석 벽면에 붙은 커다란 핑크 스티커는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자리’임을 강조한다. 임신 전이었다면 무감각하게 지나쳤을 문장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임산부란 무엇인가? 태아를 앞세우지 않고는 자리 하나도 보전할 수 없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보이는 임산부 관련 캠페인은 찍어낸 듯이 똑같은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임산부의 약자성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여겼는지 태아 시점에서 감정 이입한 픽션들이 시민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2016년의 보건복지부 공익광고에서는 아역 배우가 양보를 받을 때마다 감사 인사를 반복하는 연출을 통해 임산부 배려를 아동 배려로 환원했고, 최근 모 카시트 업체에서 기획한 임산부 캠페인은 임산부와 카시트를 동급으로 놓는 초유의 비유를 탄생시켰다. ‘태어날 소중한 아기를 위해’ 미래 투자 차원에서 임산부’도’ 배려해야 한다는 호소는 기이하고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나의 본체가 아이인 듯이.

이 태아 중심적 사고방식은 공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도 지배한다. 사람들은 임산부에게 조언을 빙자한 충고하기를 즐긴다. 건강한 임신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준수해야 할 투-두 리스트와 낫-투-두 리스트가 쏟아지고 각종 미신이 난무한다. ‘뱃속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마음가짐을 밝게 하란다. 급격한 신체 변화, 주체성의 수축, 분만 공포, 예측 불가능한 미래, 양육자의 자격에 대한 고민이 임신 기간 내내 사라지지 않는데, 임산부가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져야 할 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나는 말 몇 마디로 나를 통제하려는 시도들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임산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출산의 무게를 실감하고, 태아와 모체의 안전을 위해 가장 노력하는 당사자는 임산부다. 너무 많은 사람이 태아를 위하는 마음과 임산부를 위하는 마음을 구분하지 못한다. 양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산모보다는 태아가 먼저라고 제멋대로 우선순위를 매긴다. 간단히 말해, 한국 사회는 임산부를 배려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러나 분만 준비를 돕는답시고 주변에서 관성적으로 얹는 언행이나 태도는 놀랍게도(!) 임산부의 심리적/정신적 안정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이제는 임산부가 아닌 주변인이 지켜야 할 투-두 리스트와 낫-투-두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 보자.

 

1. 임산부의 체형을 재단하지 않는다

나는 임신 7개월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하객들이 임산부의 결혼식에서까지 신부의 체형을 품평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임신하더니 살이 쪘다”라는 사장어른의 한 마디가 친언니의 입을 타고 내 귀까지 들어왔을 땐 나의 몸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하객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체중에 대한 평가를 받아도 되는 사람은 없지만, 임산부의 몸은 유지관리가 가능한 영역 밖에 있기에 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태아 발육과 출산에 최적화된 환경을 조성하는 모체는 같은 영양 공급으로도 더 많은 지방을 축적한다. 입덧으로 살이 빠지기도 하고, ‘먹덧’으로 살이 찌기도 한다. 내 몸이 나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느낌은 좌절감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 몸에 대한 주변인들의 평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스트레스뿐이다. 날씬해 보이는 임산부에게 “살 좀 찌워야겠다”라고 조언하거나, “살쪄서 보기 좋다” 혹은 “임산부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하지 말도록 하자. “임신한 몸이 아름답다”라는 말도 마찬가지. 내가 알고 있는 내 몸과 타인이 평가한 내 몸의 간극은 불쾌한 인지 부조화를 일으킨다. ‘임산부다운’ 몸 같은 것은 없다. 임산부가 달라진 몸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당신은 모른다. 여성의 체중 변화에 대한 언급을 인사치레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뭐라도 코멘트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할 말이 없으면 하지 않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은 더더욱 하지 않는 미덕을 갖춰보도록 하자.

 

2. 태아의 성별에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는다

성별, 물어볼 수 있다. 해외에서도 ‘Boy or girl?’이라는 질문은 자연스럽지만, 한국인들처럼 거리낌 없이 태아의 성별에 가치판단을 개입시키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여아 낙태를 일삼던 야만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키우기 편하고, 상냥하고, 애교가 많고, 대화가 원활하고, 부모를 잘 챙기는’ 딸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실체 없는 개념을 내세우거나, 집안에 남자가 있어야 ‘든든하다’는 심정적 근거를 들어 남아를 선호한다. 심지어 초산을 앞둔 임산부더러 ‘첫째는 아들이니까 둘째는 딸 낳아야겠다’거나 그 반대의 상황을 가정하기도 한다. 덕분에 산후조리원만 가 봐도 아이의 성별 때문에 울었다는 산모들이 보인다.

 

임신과 출산의 무게는 제삼자가 계획을 세워줄 만큼 가볍지 않다. 딸이건 아들이건 힘들게 낳아서 열심히 길러내야 하는 임산부 앞에서 ‘요즘은 딸이 좋다던데’라거나 ‘그래도 아들이 있어야’라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면 정말로 큰 결례를 범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회에서 성별에 따른 역할을 주입하고, 임산부로 하여금 특정한 ‘효과’를 기대하게끔 부추기는 문화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아이는 입맛에 맞게 수집하고 꾸미는 인형도, 육아의 리워드도, 노후 보험도 아니다. 아이를 잘 키워 투자 자원을 회수하겠다는 기대심리가 얼마나 쉽게 소유의식으로 전이되는지, 그리고 다음 세대에 얼마나 큰 부담을 지워 왔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임산부부터 태아 성별의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사회 차원에서 도와야 한다.

 

3. 수유 방법에 참견하지 않는다

갓 출산한 산모를 가장 고되게 하는 것은 모유수유, 그중에서도 산후조리에 집중해야 하는 산욕기(분만 후 6주까지)의 모유수유다. 아무리 필기를 공부하고 실기를 연습해도 모유수유 실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산모의 몸은 아주 취약하다. 출산 시 분비되는 ‘릴랙신’ 호르몬이 근육과 인대를 이완시켜 조금만 무리해도 손목, 발목, 허리, 골반, 무릎 등에 통증을 느낀다. 자궁 내 혈액, 점막, 세포, 박테리아 등이 배출되어(‘오로’) 생리대보다 훨씬 큰 산모 패드를 차고 생활하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회음부 절개 혹은 열상으로 부어오른 아랫도리가 분비물로 피떡이 되고 쿰쿰한 악취를 풍긴다. 산모는 이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하루 대여섯 시간을 오로지 수유에만 투자한다. 밤낮 없는 수유노동으로 인한 수면 부족은 산후우울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모유 분비가 더디거나 젖양이 부족해도 고민이고, 젖몸살, 유선염, 이스트 감염 등 신체적 고통도 수반된다. 모유수유는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외로운 업무인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수유에 참견한다.

 

이 같은 난관을 예상했건 아니건, 임산부가 모유수유를 계획하고 있다면 신뢰와 지지를 보내줘야 한다. 당신이 모유수유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모유수유가 힘들다던데’, ‘요즘은 분유도 잘 나온다던데’ 같은 말로 사기를 꺾기보다는 수유부가 실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문제상황을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자. 분유수유도 마찬가지다. 모유수유가 엄마의 의무도 미덕도 아니듯이, 분유수유에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임산부는 중립적인 상태에서 모유수유와 분유수유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고, 장단점을 재어본 뒤 본인의 신념에 따라 수유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등 떠밀리듯 모유수유를 시작했다가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도와줄 수도 없으면서’ 모유수유를 푸시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이 같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없도록 임산부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주변인의 역할이다.

 

4. 커리어 계획을 추궁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산모는 출산과 동시에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이라는 이중 업무에 투입된다. 사람들은 흔히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섞어서 ‘뭔지 모르지만 비슷한 것’으로 셈하는 오류를 범하지만,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양립하기보다 상충하는 관계라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육아노동은 청소, 요리, 물품관리 등 더 많은 가사노동을 발생시키고, 가사는 육아노동에 투자되었어야 할 시간 자원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아기를 오 분 십 분 울려서라도– 관리되기 때문이다. 육아는 단순히 내 자식의 예쁜 짓과 예쁜 얼굴을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육체노동, 정신노동, 감정노동이 결합된 삼중 노동이며, 여기에 얹어진 가사노동은 이중고를 발생시킨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예비)전업주부를 향해 ‘집에서 놀아서 좋겠다’고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된다.

 

임신은 높은 확률로 커리어에 위기를 가져온다. 한국의 노동 환경에서 충분한 출산휴가-육아휴직을 받는 직장에 근무하는 여성은 소수에 불과하다. 퇴사 임산부는 내가 ‘가치를 인정받는 노동자’로서 사회에 다시 편입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 그 긴 시간을 투자해 쌓아온 교육 수준과 경력이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는 패배감에 시달린다. 한편, 휴직 임산부는 출산 후 커리어와 육아를 양립할 수 있을까, 양육의 의무 때문에 조직에서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임산부는 출산 후에 어떻게 더 잘 ‘나’를 지킬 수 있을까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당신이 모르는 계획이 세워져 있을 수도 있다. 임산부가 이슈를 공유하고자 한다면 대화를 나눠도 문제는 없지만, 불투명한 미래를 목전에 두고 침묵하는 임산부에게 꼬치꼬치 계획을 캐묻거나 전업주부 환상을 추켜세우며 부담을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5. 배우자: 양육 동반자로서 신뢰감을 준다

육아는 여성이 생래적으로 타고나는 자질이 아니다. 여성도 생전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 우왕좌왕하고, 실수하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육아를 ‘학습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육아에 더 뛰어나 ‘보이는’ 것은 여성이 24시간 육아 현장에 투입되면서 돌봄노동에 총력을 기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본능적으로 안다”라는 말은 일종의 모성 신화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배가 고픈지, 졸린지, 심심한지 파악하는 능력은 그만한 경험치가 쌓이지 않고는 생길 수 없다. 쉽게 말해 엄마는 울음소리를 질리도록 많이 듣고, 아기에게도 최소한의 표현력이 생겨야 한다(신생아의 울음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육아는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똑같이 어려운 과제다. 임산부도 자신에게 맡겨질 주 양육자의 임무를 상상하면 긴장되고 떨리기는 마찬가지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배우자에 대한 신뢰, 즉, 배우자가 육아를 분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인물이라는 믿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육아 분담이란 ‘실효성 있는 업무 분장’을 의미한다. 육아는 아이가 기분이 좋고 예쁠 때 귀여워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기의 발달 단계에 맞게 요구를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노동력을 투입하는 지성적 행위다. 그래서 기저귀 갈기, 목욕시키기, (분유)수유하기, 속싸개 싸기, 잠 재우기, 배냇저고리 입히기, 대소변을 통한 건강 상태 체크 등 신생아 관리에 적용 가능한 지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누군가는 출산 후 와이프에게 차근차근 배우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아프고 피곤한 몸으로 일일이 가르쳐주는 것도 꽤 힘에 부칠 뿐만 아니라, 내가 임산부 시절부터 매달려온 문제에 배우자가 너무도 무지하다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산 전부터 ‘출산 교실’에 함께 참석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산부인과 문화센터에서는 배우자와 함께하는 출산 교실(임산부 교실)을 운영한다. 일반적으로 월 1회, 주말에 진행되며 수강료도 합리적인 수준인 부부동반 현장 클래스에는 아기 모형으로 직접 실습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진지하게 배우는 자세로 육아 동참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임산부에게는 커다란 지지가 된다. 사정상 이조차 어렵다면 육아서라도 사서 틈틈이 읽는 성의를 보이자.

 

 

최근 임신한 지인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임산부인지 아닌지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하면서 비켜주지 않는다’면서 그 스캔하는 시선이 싫어서 배려석 앞에 서지도 않는다고 했다. SNS상에는 지하철 노약자석 임산부 아이콘에 X 표시를 그려 넣어 반달라이징(vandalizing)한 사진이 돌아 다닌다. 임산부 지정석을 ‘질싸(질내사정) 인증석’이라고 조롱하는 인터넷 게시물,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한 남성들과 노인들의 사진을 본다. 임산부 5명 중 1명이 ‘모르는 사람에게 불쑥 배를 만져지는’ 경험을 한다는 기사에는 그게 뭐 어떠냐는 답글이 달려 있었다. 정말이지 괴상한 문화다. 공공의 의무는 사라지고 사적 영역의 침범만 남았다.

 

어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요구들을 불편해할 것이다. 왜 이렇게 갑자기 뭘 하지 말라고 할까? 저런 말들에는 아무런 나쁜 의도도 없고, 굳이 신경 안 쓰고도 잘만 살아왔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인 배려와 감수성이 필요하다. 임산부들은 불쾌한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듣는 게 당연한 줄 알고’ 혹은 ‘분쟁이 싫어서’ 참아 넘겨온 것뿐이다. 호주 이민 후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던 말들을 생각한다. 누구도 내 몸을 문제 삼지 않았으며, 아이의 성별을, 수유 방법을, 나의 커리어를 ‘걱정’해주지 않았다. 그 순수한 축복들, 이어지는 담백한 인사들. 임산부를 위한 정신적/심리적 서포트는 이 같은 ‘적정 거리 유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임산부는 공공재가 아니고 태아도 사회의 자산이 아니다. 임산부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감각을 잃지 않도록, 자기도 모르게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에 매몰되지 않도록 힘을 더해 주자.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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