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야 사는 여자들(1): 사건의 재구성

 

연애하며 작아지기

남자들이 잘난 여자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나는 연애라는 친밀한 관계를 통해 본심을 엿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시 나에겐 서울 소재의 대학생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타이틀도 없었는데, 나와의 학력 차이가 큰 남자들은 나의 존재를 도저히 못견뎌하는 듯 했다. 세상에는 (비꼬는 의미로) “가방끈 길어서 좋겠다”, “너는 네가 잘난 줄 알지”, “네가 하는 공부는 쓰레기고 네 동기들도 전부 쓰레기다”라는 말을 애인에게 하는 남자들이 정말로 있다고, 게다가 한둘이 아니라고 배우기 위해 치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그들은 내가 유식한 티를 낼 때, 나에게서 주관을 발견할 때, 마침내는 예측할 수 없는 아무 순간에나 내 가치를 깎아내릴 기회를 노렸다. 영문을 파악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고, 변덕스럽게 쏟아지는 신랄한 폭언으로 인해 입은 내상은 상당했다. 그 적대의 동기가 자격지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작아지는 법을 익혔다. 잘난척하지 않고, 알아도 모른 척하며, 나의 업을 그들이 하듯 무시하고, 상대의 사소한 부분을 귀신같이 찾아내 칭찬하는 여자가 되면, 그들이 더 이상 나에게 화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구직하며 작아지기

서른을 목전에 두고 취업문을 통과하는 길은 끝없는 터널같았다. 회사 규모를 가리지 않고 매일매일 구직에 매달렸는데 놀라울 만큼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모 구직 사이트에서는 이력서를 제출하면 다른 지원자들의 스펙을 열람할 수 있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내 조건이 ‘서류광탈’ 감은 아니었다. 지원직종 관련 전공자였으며, 학점도 무척 좋았고, 약간의 활동 경험도 있었는데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회사가 없었다. 왜였을까? ‘어쩌면’, ‘만에 하나’, 내가 여자라서, 공부를 ‘쓸 데 없이’ 더 한 여자라서, 게다가 ‘나이까지’ 든 여자라서, ‘조금 그런’ 게 있지는 않았을까? 때때로 조심스러운 의심이 떠올랐지만, 편집증적 망상일 뿐이라며 저편에 묻어버렸다. 미디어에서는 청년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힘들다고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여론을 지배한 헬조선론이나 수저론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여성보다 청년 일반으로 분류했다. 취업 특화형 인간이 되기를 외면했던 내가 경험하는 실패는 당연한 결과이며,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로 돌아오는 업보라고 여겼다. 잘나지 못한 나의 탓이다.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던 그 남자들의 말처럼.

 

직장에서 작아지기

취업 적령기를 놓친 고학력-오버스펙 신입 여직원을 원하는 회사를 찾기까지는 무려 일 년이 걸렸다. 입사 동기가 하나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연령의 고학력 여성이었다(사장의 독특한 취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입사 첫날 우리에게는 각각 여자 사수가 붙었다. 둘 중 하나는 수습기간 후 사라질 수 있고, 그 생사 여부가 우리를 교육한 사수들의 인사평가에도 반영될 거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편 가르기로 석연찮게 시작한 회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나의 동기는 체계 없는 업무 시스템과 타 부서 뒤치다꺼리에 질려버린 나머지 수습기간이 끝나기 전에 사직했다. 윗선에서는 공석을 ‘시키는 일 묵묵히 잘하는 체력 좋은 남자 직원’으로 채워야겠다고 말했다.

예상과는 달리, 우리 팀에는 신입 대신 상사가 하나 늘었다. 여성 팀장의 리더십 부족이 조직 저성과의 원인이라고 판단한 대표의 결정이었다. 없던 자리를 만들어 보스가 된 사람은 전문분야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은 없지만 ‘영업 마인드’가 있는 아저씨였다. 배는 산으로 갔고 기존 여성 팀장은 사표로써 더 이상의 모멸을 거부했다. 옆 팀에서는 몇 년이나 근속한 여자 직원이 출산을 앞두고 회사를 나갔다. 그리고 길 가다 벼락 맞은 듯이, 계획하지 않은 아기가 찾아왔다. 비혼 여성이었던 나의 임신을 가십거리 삼을 사무실 풍경이 징그러워서, 여자는 안 되는 세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적립되고 싶지 않아서, 이리저리 둘러대며 퇴직 절차를 밟았다.

 

 

여성 생활 미디어 핀치(http://thepin.ch)에서 3회 분량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2018년 상반기 서지현 검사의 내부 성폭력 고발과 은행권 성차별 채용비리 뉴스를 접하고, 여성의 (가시적)경제활동-사회진출에 얼마나 많은 장벽이 세워져 있는지 생각하며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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