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옮기며

 

임신을 발견한 직후 호주로 이주하기까지 정확히 3개월이 걸렸다. 평생 익힌 재주라고는 글 쓰기밖에 없는데, 영어 모국어 화자가 아닌 내가 현지에서 ‘무엇을 쓰는 사람’으로서 커리어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작은 것이나마 기록해보자는 막막한 심정으로 티스토리에서 블로그를 열었다. 한국 업체로부터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바이럴 블로그가 될 수는 없겠지만, 구글 광고 정도는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내 이야기를 읽어주는 독자들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초기에는 맛집 리뷰나 집밥, 여행, 이민, 결혼 생활에 관한 글이 주를 이뤘다. 한국 특유의 블로그 레시피에 불만이 많았으므로, 가독성이 좋고 정확한 계량을 제공하는 새로운 형식을 도입해보자는 계획도 있었지만, 그 일을 추진하기에는 열정이 좀 부족했다.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에 매여 있는 일들을 아기가 잠든 뒤까지 연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아주 가까운, 나를 늘 응원해주는 친구 S는 블로그 아이덴티티에 아쉬움을 느꼈던 모양이다. S는 나보고 꾸준히 문화비평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당시에 나는 앉아서 안아주지 않으면 낮잠을 자지 않는 아기 덕분에 하루에 몇 시간을 멍하니 쇼파에서 보냈다. 행동에 제약이 컸기 때문에, 그런 시간에는 주로 TV를 봤다. 몇가지 프로그램의 리뷰를 썼고, 운 좋게도 서치를 통해 내 글을 눈여겨본 매체에서 송고 제의를 받았다.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긴다는 사실이 기뻐서(아직도 천만원의 학자금 대출이 남아 있다) 2017년 상반기에는 정력적으로 글을 썼다.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치이면서 한 달에 세네편 정도의 글을 쓰려면 새벽 네다섯시에 자야 했다. 그나마도 밤마다 자다 깨서 엄마를 찾고, 잠을 자지 않으려고 떼를 쓰고, 이앓이로 잠을 설치며 ‘글 쓸 시간을 빼앗는’ 아기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반기에는 개인적 환경 변화와 잦은 음주, 건강 악화로 인해 이전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최근에는 글 쓰는 템포가 아주 느려졌다. 글에 집중할 환경도 아니었지만, 기승전결 구색을 갖춘 글을 일 년 이상 쓰다 보니 퀄리티 컨트롤 기준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고방식도 많이 변화했다. 트위터에서 논의되는 페미니즘 아젠다가 작년의 같은 시기와 비교하면 매우 구체적으로 분화되었으며, 소위 여성주의자끼리도 각자의 입장, 노선,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하는 상황을 빈번하게 목격하면서 ’80년대생-기혼-유자녀-남아출산-시스젠더-헤테로-여성’인 나의 포지션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로그를 이사하면서 티스토리에서 작성했던 100여개의 글 가운데 삼 분의 이 정도를 쳐냈다. 지금에 와서는 작년에 쓴 글에서도 부정하고 싶은 표현이나 문장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블로그에는 ‘작성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감안해’ 최소한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글만이 공개되어 있다.

 

나의 제1직업이었던 글 쓰는 일이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가, 두 번째 직업 내지는 부업으로 다시 들어온 지금은, 쉽게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물론 예전에도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더하다는 뜻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글을 매우 힘들게 쓰는 사람이다.). D매체와의 협업은 대체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트위터 계정에서 글을 공유하면 나에게 공감할 만한 사람들의 손을 타고 확산되지만, D매체에 글을 공개하는 일은 대체로 나의 입장과 가장 반대에 있을 독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제안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면서도 고된 점이 있었다. 올해 들어 내 생각을 좀더 편하게 개진할 수 있는 매체를 찾다가 핀치와 작은 연을 맺게 되었고, 앞으로도 어떤 발상이 떠오르면 주로 핀치에 컨택을 하겠지만, 핀치는 유료 구독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예전처럼 검색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글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최근에 뭔가를 새로 시도해 볼 기회를 잡게 되어, 온라인 글쓰기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적어질 것이다. 이 블로그에 얼마나 자주 업데이트가 될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재정비를 한 김에 조금 더 가볍게 자주 글을 쓰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2018년 상반기는 훗날 되돌아보면 또 다른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라고 습관적인 감상을 느끼다가 그래도 주어진 환경 내에서 최선을 다한 내 덕이라고 생각을 고쳐 쓴다. 인생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버릇도 이제는 그만 버릴 때가 왔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8 Comments

  1. Julie

    탱알님 글 팬이예요! 근데 이거 구독은 어떻게 할 수 있나요? @.@

    • 탱알

      헉 안녕하세요 쥴리님! 댓글 확인이 늦어 죄송합니다!
      RSS구독을 해주셔야 되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위젯 기능이 없는 테마를 사용하고 있어서(…) 구독 링크가 따로 없습니다; http://taengal.com/rss 주소를 따로 추가해 주셔야 된다고 합니다… 흑흑… 불편 드려 죄송합니다…
      글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2. 엘모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이사하신건 오늘 알았네요 ㅎㅎ 응원합니다~

    • 탱알

      안녕하세요 엘모님! 응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

  3. kohen

    D매체… 그러니까 딴지일보에서 탱알님의 글들을 한동안 열심히 읽었던 애독자입니다.
    잊고 있다가 생각나서 검색해 보니 블로그가 떠서 반가움에 댓글 남깁니다.
    다방면으로 좋은 글 많이 써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언젠가라도, 탱알님의 맛깔나는 새 글들을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탱알

      안녕하세요, kohen님. 댓글 확인이 늦었습니다.
      블로그를 이사하고 나서 딴지에서 제 글을 눈여겨 봐주셨던 분들이 댓글을 종종 남겨주셔서 뒤늦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피드백 점검을 거의 안했기 때문에…. 지금은 좋은 기회가 생겨서 책을 쓰고 있는데, 시간 관리가 쉽지 않다보니 블로그도 멈춰 있습니다. 아마 내년 상반기부터는 다시 이런저런 글들을 쓰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그래봤자 두달 남았군요…..;;;)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더 좋은 글로 또 다시 찾아뵙도록 할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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