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0): 들어가며

 

얼마 전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를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72년에 가족사회학자 제시 버나드가 했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결혼은 여성의 건강에 유해할 수 있다.” (…) 이런 연구에서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보다 우울증이 20퍼센트 더 많이 발병하고 중증 신경증은 세 배 더 많이 나타낸다. 신경쇠약, 신경과민, 심계항진, 무력감도 기혼 여성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 다양한 증상들이 기혼 여성들을 더 많이 괴롭힌다.” “저명한 정신 건강 연구자 제럴드 클러먼과 미르나 와이즈먼은 여성 우울증에는 두 가지 큰 원인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결혼이었다.”

일련의 연구 데이터들은 1980년대 미국 저널리즘 및 미디어를 통해 전투적으로 확산된 페미니즘 백래시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반지성적인 협잡질이었는지 반증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었다. 미국 페미니즘 운동이 황금기를 맞았던 70년대 이후, 안티페미니스트들은 여권 신장 역사의 시계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더 많은 여성이 가부장제 밖에서 경제적 주권을 확보할 미래에 느끼는 남성 집단의 반감은 싱글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안녕에 대한 가짜 우려로 표출되었다. 이 가짜 우려를 그럴싸하게 치장하는 데 동원된 근거와 논리들도, 물론 가짜였다. 여자들을 말그대로 집안에 ‘처넣기’ 위해 세계가 공모한 연극은 그럼에도 믿을 수 없으리만치 흥행했다. <백래시> 1부에서 저자는 이 대여성 사기극의 소품 하나하나를 그의 무대 위로 끌어올려 집요하게 망신을 준다.

나는 웃었다. 그 연극의 터무니없는 조악함도 우스웠지만, 나를 진심으로 웃게 만든 것은 -글머리에 인용한- 여성 정신건강과 결혼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행동이 정신적으로 다소 건강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내가 바로 그 기혼여성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일지라도 어쨌든 나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결혼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구성한 나의 오랜 가설을 뒷받침할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에! 남성의 경우, 결혼이 정신 건강 향상에 기여한다는 책 속의 진술 또한 나의 가설과 맞아 떨어졌다. 수잔 팔루디가 수집한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결혼은 생존을 지속한다는 측면에서 여성보다 남성에게 두 배 정도 유익하며” “싱글 남성들은 싱글 여성에 비해 정신 건강상의 문제로 힘들어할 가능성이 두 배 높고” “정신 스펙트럼의 어디를 보든지 간에 이혼 남성의 상태가 (이혼 여성보다) 더 나빴다.”

‘경험적으로 구성한 나의 오랜 가설’이란 거칠게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 여자에게 남자는 정병 유발자들이다.

 

한녀 살려

나는 남자가 사라진다면, 정확히 말해 남성이 온통 전유하고도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힘쓰고 있는 젠더 권력이 무효화된다면, 여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해질 거라고 믿어 왔다. 다시 인용문으로 돌아가보자. 제럴드 클러먼과 미르나 와이즈먼은 “여성 우울증의 두 가지 큰 원인”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결혼”을 꼽았다고 하지만, 이 두 가지 원인은 실질적으로 한 가지 원인으로 수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에게 결혼은 낮은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고, 여성의 사회적 열위는 근본적으로 남성의 사회적 우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여성혐오다.  

이와 관련해 한국 여성의 자살률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2016년 WTO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 여성 자살률은 세계 4위를 기록했다(10만명 당 15.5명).[1] 일반적으로 여성 자살률(세계 평균 10만 명당 7명)보다 두 배가량 높은 남성 자살률(세계 평균 10만명 당 15.6명)에 준하는 숫자였다.[2] 최근 중앙대 적십자간호대학 장숙랑 교수는 코호트 조사법을 적용해 한·일 국가별/성별/연령대별 자살사망률을 도출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한국 여성의 자살사망률 그래프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을 만큼 기형적인 선을 그리고 있었다. 1956년생부터 한국 남성을 앞지르기 시작해, 1976년생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더니, 1986년생에 이르면 한국 남성 자살사망율의 2배에 달하고, 1996년생에 최고치(약 7%)를 돌파하면서 나머지 세 개의 대조군을 압도했던 것이다.[3] 장 교수는 1981년 이후 출생 한국 여성이 경험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을 “전쟁 트라우마”에 비교했다.

한국에서 20대 여성 자살자가 20대 남성 자살자를 추월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다.[4] 어떤 기사들은 ‘88만원 세대’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남성 청년보다 심각한 취업난과 주거난을 경험했을 여성 청년이 우울 요인에 더 크게 노출되었을 거라는 추론이다. 그 또한 성차별의 결과물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라고 끝맺기엔 뒷맛이 찝찝하다. 왜 하필이면 1981년생일까?

81년생이 20대가 되었을 때, 그들이 목격한 00년대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회상해 보자. 온라인에서는 ‘개똥녀’ ‘엉습녀’ ‘된장녀’ ‘루저녀’ 같은 여성혐오 낙인 스포츠가 기승을 부렸고 오프라인에서는 힙합 클럽의 강간문화가 성행했으며(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성추행·성폭행이 ‘부비부비’와 ‘원나잇’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되었을지 가늠할 수 있는가?) 브라운관에서는 로맨틱코미디의 폭력적인 남주인공이 활개를 쳤다. 지금에 와서 90년대 VCR 자료에 기록된 청년 여성의 모습이 오히려 더 자유롭고 진취적으로 보이며, 생각보다 진보적인 젠더 감수성으로 쓰여진 90년대 드라마 대사들이 재평가되는 것은 까닭 없는 감상이 아니다. 영페미니즘 붐 이후, 경제 위기와 함께 찾아온 백래시는 여성 인권을 후퇴시키기 위한 총력전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갓 20대가 되었고, 앞으로 될 여자들은 ‘전쟁 트라우마’에 준하는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너 때문에 미쳐

남자가 여자의 ‘정병’을 유발한다는 말은, 이렇게 사회문화적인 요인을 등에 업고 남성 권력이 여성의 삶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포함하지만, 그 영향권 아래 발생한 사적인 공간에서 남자가 여자를 말 그대로 ‘미치게’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연애나 결혼. 연애에 목숨 건 여자들, 그 남자가 나를 망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여자들, 혹은 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들, 그 뒤에도 또다시 나를 망치는 남자를 만나는 여자들, 연애가 끝나고 심리 상담을 받는 여자들 … 의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안다. 이상한 엄마 얘기들? 말할 것도 없다. 최근 네이트판 ‘식칼 사건’에 뛰쳐나온 온갖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자들 수만큼, 우리 모두의 엄마는 조금씩 이상한 사람이었다(물론 이상한 엄마도 아들에게는 좋은 엄마이므로 이 이상한 엄마 현상은 여자들만이 온전히 공감한다).

나는 늘 나의 엄마가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빠와 자주 싸웠지만 딱히 우리의 편을 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어쩌면 엄마는 자기보다 우리를 먼저 포기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아빠가 우리에게 용납되어서는 안 될 행동을 할 때 아빠의 뒤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엄마는 고성을 지르고, 가출을 하고, 삭발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의하는 삶이 고단해서였을까? 그 열띤 영혼은 엄마의 40대가 끝나면서 함께 휘발되었다. 영혼을 ‘놓쳐’ 버린 후, 엄마는 비로소 아빠를 마음으로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상담가를 찾는 대신 종교를 전전하며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엄마의 행복은 마취된 상태에 가까워 보였다. 발이 땅에서 한 뼘쯤 붕 떠 있는 것처럼, 엄마와 내가 감각하는 현실은 너무 달라서 나는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이 엄마를 그저 통과한다고 느꼈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점은 여성과 남성 간의 심리적 거리가 가장 가까워진 상태에서, 생활 반경 공유를 통해 물리적 거리마저 극단적으로 좁아진다는 것이다. 사랑 노래가 울려 퍼지던 관계에 생활이 개입하면서 여성은 젠더 권력의 정체를 실감하게 된다. 젠더 권력이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해도, 여성혐오나 성차별이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한다 해도, 기혼여성에게 균열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물론 어떤 기혼여성은 이 문제를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정도의 무게로 받아들인다). 그 균열은 내가 휴식을 취해야 할 공간을 타인이 듣지 못하는 미세한 소음으로 채운다. 소음을 멈춰 보겠다고 애쓰거나 소음에 적응하고 살기로 했거나, 어느 쪽이건 이런 환경은 여자를 미치게 만든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이 소음과 충돌 없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영혼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엄마에게 일어났던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혼여성의 정신 건강을 저해하면서 기혼남성의 정신 건강은 고취하는 결혼 효과를 통해 우리는 남성이 기생충이나 뱀파이어처럼 여성의 생존 자양분을 빨아먹는다는, 가부장제적 결혼이 바로 그러한 삶의 질 향상을 창출하는 제도라는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출산능력이 없으면 재생산을 할 수 없으면서, 여성의 돌봄노동이 없으면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없으면서, 남성은 상징적인 권력만으로 왕관을 쓴다. 한편 여자를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게 하고 그 과정에서 영혼이 조금씩 닳아져서 마침내 가벼워진 그것을 포기하기 쉽도록 만든다. 설사 ‘현명한 결혼’으로 집안에서 평등한 관계를 이룩할지라도 기혼여성은 반복적인 모멸을 경험하게 된다. 집 밖의 관습이나 통념이 기혼여성을 ‘있어야 할 자리’로 수없이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나에게 결혼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결혼과 이민과 출산이 시간차를 거의 두지 않고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가족도 친구도 커뮤니티도 고향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신생아와 살아남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그 시기에 나의 많은 것이 부서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엄마’를 지켜보고도 그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고 이제는 ‘그런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분열하게 한다. 그래서 부서진 기혼여성 캐릭터는 나를 강하게 매혹시킨다. 결혼·출산·육아가 여자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미치게 하고 부서뜨리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재미있다. ‘부서진 엄마들’이라는 제목의 이 시리즈는 그런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영화 <툴리>, <유전>, <미씽>, 드라마 <굿걸스>, 웹툰 <남의 부인> 등을 다룰 계획이다.

 

 

[1] 동아사이언스, “한국은 여성 자살률 세계 4위 국가”…전세계 자살자 수 연 80만명 돌파”, 2019. 02. 07.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26679

[2] 세계적으로 우울증과 자살 시도 자체는 여성 집단에서 훨씬 더 높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남성 자살률이 더 높은 것은, 남성 자살시도자가 여성 자살시도자보다 ‘맹렬한(violent)’ 자살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BBC, “Why more men than women die by suicide, 2019. 3. 18, http://www.bbc.com/future/story/20190313-why-more-men-kill-themselves-than-women)

[3] 동아사이언스, “’82년생 김지영’ 51년생 엄마 세대보다 “살기 더 고달파””, 2019. 6. 27,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29581

[4] 한겨레, “제 명에 못 죽는 20대 여성들…왜?”, 2009. 08. 20., http://m.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372285.html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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