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왕생〉, 우리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극락왕생〉 1화 ‘당산역 귀신’ 중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귀신, 을 그려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흑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자를 떠올릴 것이다. 귀신을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우리는 그 형상으로부터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현상이 연민할 만한 사연(‘한’)에서 생성되었다고 짐작한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라 할 수 있는 ‘한’은 여성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장 비천한 삶에 배어드는 정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대당한 여자들 외에도 낙태아, 버려진 아이들, 미쳐버린 노인들, 자살사망자들 … 이 이승을 떠나지 못할 거라 흔히 생각한다. 충분히 애도 받거나 기억될 수 없는 죽음으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람됨’의 경계 밖에 내몰린 존재들은 죽어서도 이승을 부유하느라 저승에 소속되는 데 실패한다. [1]

[1] ‘사람됨’에 관한 논의는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를 참고했다.

귀신이라는 발상이 낙인 찍고, 배제하고, 소외시킨 것들을 향한 뭇사람의 죄책감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공포와 죄의식 사이의 긴밀한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추방당한 것들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추방자들은 ‘원혼’을 상상하면서 사적이고 심리적인 방식의 처벌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산 자들은 무거운 사념에 영영 구속되는 삶을 원하지 않게도 마련이다. 죽은 자의 억울한 사정을 밝혀주거나 장례를 제대로 치러 줌으로써 망령을 천도시키는 귀신 이야기의 결말 관습은 우연히 형성된 것 같지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기’라는 행위, 즉, 사회적 환대의 의례를 갖춤으로써 버림받은 것들의 ‘사람됨’을 조금이나마 회복시킨다면 그들이 품은 원한도 해소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공포 메커니즘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귀신-공포물은 비윤리적이 되기 쉽다. 양식화된 귀신 이미지의 말초적 소비가 목표인 공포물은 ‘사람됨’에서 배제된 대상들, 달리 표현하면 사회적 소수자를 타자화하는 기제를 증강한다. 오늘날 우리는 삼사십대 남자 귀신보다는 어린아이와 여자 귀신이 더 으스스하다고 심정적으로 합의했으며 이 합의에 따라 일어나는 심상을 의심하지 않는다. 기괴한 인상을 증폭시키기 위한 도구로 동원된 훼손되고 비틀리고 변형된 신체는 ‘다른’ 몸들을 다시 한 번 정상성 밖으로 밀어낸다. 일상적인 ‘정상성’과 소름 끼치는 ‘비정상성’이 대치하는 감각의 도식에 의해 현실의 권력 구조는 픽션에까지 고스란히 이식되곤 했다. 여성, 아동, 노인, 장애인은 생사의 법도를 교란시키는 무질서한 몸으로 소환되는 가운데, 저승에서마저 질서를 집행하는 사자와 시왕들은 의심 없이 남성형으로 대표되곤 하는 것이다(웹툰 〈신과 함께〉, 〈서북의 저승사자〉, 〈고인의 명복〉).

<극락왕생>은 습벽이 되어버린 이 재현 규칙을 의도적으로 비껴 나가는 웹툰이다. 대승불교에 기반해 심도 깊은 유니버스를 구축한 작품 속 세상은 낯익고도 낯설다. 시각적 스테레오타입을 제법 충실히 따른 ‘당산역 귀신’이 압도하는 도입부는 호러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길 미끼일 뿐이다. 비 오는 날, 합정역과 당산역 구간에 출몰한다는 이 여자 귀신은 오싹한 생김새와는 달리 하는 짓이 좀 싱겁다. 눈 마주친 사람에게 2000년대 가요 〈낭만 고양이〉를 부르게 하고 사라지는 게 전부다. 늘 초만원에 인력부족인 지옥도지만, 지옥도에는 이토록 하잘것없는 귀신도 허투루 넘어가줄 수 없다는 ‘일중독’ 호법신이 있다. 지장보살의 좌협시이자 지옥도 행정팀 ‘도명반’의 수장인 도명존자다. 지장보살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사심 반,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대의 반으로 인간도에 임한 도명은 당산역 귀신을 처단하지만, <극락왕생>의 육도(지옥도ㆍ축생도ㆍ아귀도ㆍ아수라도ㆍ인간도ㆍ천상도)에서 이런 짓은 위법이다. 제법 현대적인 조직문화의 꼴을 갖추고 돌아가는 이곳 신들의 세계에는 각 부서의 관할권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명은 사람을 해코지하는 악귀만을 소탕한다는 인간도와 지옥도의 협정을 어겼고, ‘천수천안’으로 우주를 보살피는 관음보살은 도명보다 한 수 위다. 도명의 자비 없음을 부드럽게 꾸짖으러 강림한 듯했던 관음은 도명에게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과제를 내린다. 당산역 귀신의 전생, 박자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를 다시 살게 할 테니 곁에 머물며 박자언을 ‘극락왕생’ 시키라는 것. 꼼짝없이 자언과 콤비를 이루게 된 도명만큼이나 하루아침에 사람이 된 자언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7년 전의 부산, 해왕여고 3학년 수험생으로 돌아온 그는 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지각할 수 없다. 눈 돌리는 곳마다 귀신이 들끓고 신들이 현현한다. 자언이 이 낯선 감각에 익숙해지는 동안 독자에게도 주어진 숙제가 있다. 〈극락왕생〉이 설정한 우주의 법칙에 눈을 적응시키는 것이다. 비로자나(우주)의 진리를 설법하는 보살도, 육도를 관리하는 호법신도, 망자를 심판하는 지옥시왕도, 여자들로 우글대는 이곳은 완전히 ‘여탕’이다. 그리고 이 여탕에서는 ‘작고 가늘고 예쁜’ 여성 캐릭터의 조형 규칙도 가볍게 무시된다.

〈극락왕생〉 1화 ‘당산역 귀신’ 중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귀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도명이 자언을 비 오는 날 당산역에서 죽은 귀신이라 넘겨 짚듯이, 사람들은 귀신이 사망 장소에, 사망시와 유사한 조건 하에서, 심지어 사망 현장의 신체 상태를 보존한 채로 출현할 법하다고 추측한다. 귀신은 그 존재 차원에 한이 각인된 관계로 시간도 모르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할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망자의 명예를 회복해 귀신을 소멸시킨다는 아이디어도 결국 산 자의 이기심이 빚어낸 대책일 따름이다.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하니까. 귀신은 이같은 고전적 상상력에서 멀어질수록 고약한 상대로 취급된다. 귀신에게 종교인이나 무속인의 구마 의식조차 통하지 않을 때, 독자 혹은 시청자는 앞으로도 ‘그것’과 공존하며 그들의 방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몸서리치게 되는 것이다. 산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귀신은 ‘적당한’ 한을 간직한 귀신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떠나지 못함’과 ‘떠나보냄’의 관점으로 파악하면 자언에게 극락왕생의 열쇠는 ‘한’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언은 죽은 이유조차 잊어버린 귀신이기 때문이다. <극락왕생>에 등장하는 예스러운 전통 귀신들과 도시 괴담형 귀신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신발 더미 속 신발귀는 왜 신발을 모으기 시작했는지 잊어버렸고, 저주 상자를 들고 달리는 삿갓바람은 원해서 하게 된 일이 아니라 하며, 해왕여고에 출몰하는 쑥대머리 귀신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할 사람을 수년째 찾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죽었다’ 보다는 ‘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작은 사회처럼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만남과 이별 속에서 애환을 느끼기도 하는 귀신들은 ‘죽음 이후를 살고 있는’ 듯하다. 다시 몸을 얻은 자언도 2011년을 과거의 타임라인대로만은 살 수 없다. 이미 스물 여섯 해와 사후 세계를 경험한 그는 생각도, 행동도 그때 그 시절 자언과는 달라진 까닭이다. 두 번째 열 아홉 살, 자언은 지금 만나는 존재들과 새로운 여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신통력은 있지만 자비심은 없는 도명에게 자언은 꽤 배울 점이 있는 파트너다. 자언에게는 귀신을 지옥도나 천상도로 보낼 신통력은 없어도, 그들이 존재의 양태 그대로 죽음을 살아나가도록 돕는 자비심이 있다. 어떤 신도 믿어본 적도 없는 자언이 행하는 자비는 “온당하게 잘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사람은 다치지 않고, 귀신은 지옥에 가지 않고, 모두가 순리에 맞는 내일을 맞이하기를.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귀신도 아닌 자언이 생각하는 ‘온당한’ 세계란 그런 모습인 것 같다. 도명이 자언의 방향성을 인정하면서 두 사람은 귀신 때려잡는 고스트버스터즈 대신, 귀신과 공존을 협상하는 중재자로 활약한다. 펜촉으로 긁고 붓으로 찍은 것 같은 흑백톤 작화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종교적 숭고를 고취시키고,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순간들이 생활감 넘치는 여고의 일상을 가로지르며, 유쾌한 농담들과 정곡을 찌르는 대사들로 분주한 〈극락왕생〉의 놀이공원에서 자언과 도명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사연을 부지런히 캐낸다. 그리고 사연이 쌓일수록 생사의 경계는 흐려진다.

관음의 말대로 “삶에서 무엇을 기억하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정한다”면 〈극락왕생〉에서 사람의 처지는 귀신과 다를 바 없다. 귀신은 원인을 망각한 채 껍데기만 남은 행동을 반복하고, 사람은 “좋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여기 없는 거라고 생각하며” 버티는 자세로 오늘을 살아간다. 소식이 뜸해지던 소꿉친구가 주검으로 돌아온 이후 스스로를 애도의 행위에 가둬 버린 자언의 담임 선생은 귀신처럼 보인다. 기억은 사람을 멈춰버리게도 하지만 덧없이 흘러가게도 한다. 자언에게 고교 시절 친구들과 멀어진 계기는 선명하지만, 그들의 미덕은 잊혔거나 감춰져 있어 다시 탐험해야만 한다. 자언이 저릿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했던 엄마를 왜 미워하게 됐는지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을 뿐, 저마다 내밀하게 품은 고유의 우주를 다 파악할 수는 없던 관계들. 그 공백 속에서 우리는 내가 아는 것만을 인지하고, 나에게 인지되는 것만을 기억함으로써 타인과 관계한다. 인간이 귀신을 두려워하고, 인간이 신을 흠모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극락왕생〉 13화 ‘만파식적 블루스’ 중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나에게 내재된 경험을 근거로 타인을 파악하는 행위를 ‘이해’라고 부르고, 나에게 내재된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행위를 ‘애정’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우리가 인식의 한계선 내에서 타인을 ‘구성’할 수 있을 따름이라면, 피아가 하나됨이라는 관계의 이데아는 필연적으로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타인은 불가해한 심연이고, 나 역시 누군가에겐 심연인 타인이므로. 이 심연은 <극락왕생>을 수놓은 사연들의 진원이기도 하다. 고독하기에 타인을 갈망하지만, 타인을 갈망하기에 고독해지는 “미욱한” 존재들은 여전히 이 순환의 고리를 끊어 줄 구원자를 찾고 있다. ‘구원자가 아님’이 확인된 타인에게 느끼는 환멸은 구원자를 향한 열망만큼 크다. 영혼의 쌍둥이 같은 소울메이트를 기다리던 열 아홉의 자언에게 단짝친구 재경의 개성은 허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자언과 도명이 만난 여성 교수가 안수기도의 효과를 보지 못했을 때 모태신앙을 버린 것처럼.

인격신을 불특정다수가 투사한 욕망의 집합체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인격신을 회의한다는 교수의 일장연설에는 일리가 있다. 그의 신앙생활은 이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끝날 수 있었다. <극락왕생>의 신들은 이 믿음과 실재의 간격을 재현하기에 흥미롭다. 맹목적이거나, 유치하거나, 구차하거나, 가엾거나,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상상도보다 훨씬 저속한 이 인격신들 가운데는 망가진 신도 있다. 맑고 단호한 얼굴의 다른 신들과는 달리 초췌하기 그지없는 문수보살에게 ‘최고 지혜’의 영광은 옛말이다. 아수라도에서 사사로운 내기로 지혜의 칼을 잃어버리고, 수라만의 탑에 갇혀 셀 수 없는 시간을 홀로 지내다, 그 존재마저 잊힌 덕분에 허무하게 자유를 찾은 문수는 자언을 찾아왔다. 말은 자언을 돕는다지만, 보살들에게는 외면당했고 호법신들에게는 반면교사인 지금의 문수야말로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 쪽이다. 그러나 문수를 ‘헛지혜’로 타락시킨 것은 의외로 빼앗긴 칼도 감금 생활도 아니다. 문수는 아수라도에 가기 전부터 이미 엉망이었다. 무엇이 문수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관음의 말에 문수는 격노로 대꾸한다. “널 사랑하게 돼서 변한 거야! 널 사랑하게 돼서!”

수천 년을 이어 온 문수의 사랑은 지독하기에 불행이다. 문수의 사랑은 관음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에” 더 불행이다. 문수도 관음을 사랑한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관음의 사랑은 버려진 존재를 버리지 않는 측은지심에서 나오고, 그런 사랑은 문수가 인정하는 사랑이 아니다. 관음의 사랑이 귀신을 긍휼히 여기는 자언의 자비심에 가깝다면, 문수의 사랑은 도명의 숭배심을 닮았다. “여섯 세상의 가장 낮고 더럽고 추한 곳”에서 자라난 도명이 지장을 세상 전부로 알고 살아온 것처럼, 문수는 아수라도에서 절대 고독을 관음에게 투사하며 이 감정에 자폐적으로 몰두해 왔다. 문수가 연서에 쏟아낸 찬미의 말들이 관음에게 “후주(주정)하는 소리”로 일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두 사랑이 심연을 사이에 두고 만나질 듯 만나지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비로자나도 사랑을 한다. 비로자나의 총애를 받는 관음은 바로 그 까닭에 비로자나가 허락한 장소에서 홀로 지내며 비로자나가 허락한 세상만 볼 수 있다(문수는 이런 사랑이 미움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랑, 숭배하는 사랑, 통제하는 사랑…. 각기 양태는 다르지만 이 모두가 사랑이라고 불리면서 발생하는 균열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타인이 불가해한 존재라면, 그리고 타인을 향한 사랑조차 이토록 느슨하게 규정된다면, 사랑은 애당초 ‘서로’라는 부사가 어울리지 않는 행위일 것이다. 누군가 연인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상대방이 같은 표현으로 화답할 때, 우리는 두 사랑의 양과 질이 같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부모를 향한 어린아이의 사랑과 어린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는 엇갈림이 없는가? 팬이 스타를 사랑하는 방식과 스타가 팬을 사랑하는 방식은 동일한가? 인간이 신을 사랑하듯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아무리 정교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해도 발화된 순간 제멋대로 가지를 치는 언어의 뉘앙스를 붙잡을 수 없듯이, 우리가 정확하다고 확신하는 사랑에는 언제나 오해와 착각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진정한 사랑’을 실존마저 초월하는 마술적 현상으로 추어올리는 로맨스 이데올로기가 이 간극을 은폐해 왔을 뿐.

〈극락왕생〉 16화 ‘행운을 주세요’ 중

우리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가시지 않을 허기에 시달리는 아귀처럼, 신은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도 외로운 인간처럼, 소진되지 않는 충만함을 찾아 우주를 떠돈다. 그래서 <극락왕생>에서는 높은 존재도 낮은 존재도 서로를 빼 닮았다. 여기서 신, 인간, 귀신을 달리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세계가 결정한 위계다. 문수는 관음을 사랑할 때보다 자언을 사랑할 때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관음을 포기하자마자 자언을 차기 구애 상대로 지목한 문수는 자언이 “편안하고 재밌어서” 좋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무력한 것들을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처럼 말이다. 문수의 해맑은 무신경함이 내비치는 권력의 불균형은 그가 관계의 성사 가능성을 점쳐볼 때 노골적으로 가시화된다. 인간에게 보살의 사랑은 비로자나가 관음을 사랑함과 다르지 않음에도, 심지어 그러한 조건을 유리한 고지로 활용해 보려는 문수는 자언의 목소리를 들을지언정 그 내용을 소화할 수는 없다. 자언이 문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문수가 자언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문수에게 이 ‘필요’의 대상은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진실을 직시하기에 그는 너무도 망가져 있다.

<극락왕생>이 재현하는 관계들은 이타심과 이기심이, 사랑과 폭력이, 구원과 파멸이 마치 한 몸처럼 인접해 있지 않은가를 질문하게 한다. 파순의 출현이 소름보다 더 근원적인 단계의 공포로서 ‘불안’을 자아내는 것은 그런 이유다.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의 수행을 방해한 죄로 네 보살에 의해 격퇴당한 인간도 최초의 귀신, 파순에게 자언의 부활은 기회였다. 관음의 안에 갇혀 해방의 틈을 엿보던 파순이 자언에게로 옮겨가고, 자언이 파순을 받아들이면서 <극락왕생>에는 꺼지지 않는 긴장의 레이어가 삽입된다. 자언을 현혹하려고 나타났을 법하지만,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고” “바른 길과 삿된 길은 둘이 아니고” “범부와 성인은 같은 길을 간다”는 파순은 보살 이상으로 우주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수수께끼 놀이가 보살들의 불법 세계에 일으키는 거스러미는 매혹적이고도 불쾌하다. 보살조차 어떤 진실은 깨닫지 못했거나 은폐하고 있다는 귀띔은 솔깃하지만, 보살이 닦아 놓은 이정표가 ‘삿된 길’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불안을 동반하게 마련이니까.

관계에의 갈망이나 종교에의 심취는 의혹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힘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솔기 없이 매끄럽게 통합된 세계를 꿈꾸지만, 이것은 우리 각자가 심연과 함께 살아가는 한 도달할 수 없는 낙원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비극은 그럼에도 다수의 구성원이 ‘분열 없는’ 낙원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심지어 이 이상향이 이미 달성되었다고 가장하면서 발생한다. 공백과 불가해성이 주는 불안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당연하고 익숙한 것을 영구불변의 진리로 내면에 새길 때, ‘우리’가 아닌 타자는 끝끝내 변두리 밖에 위치되고 만다. 귀신 이미지가 재생산되어 온 방식과도 같이, 공동체의 반성 작업이 둔화될수록 소외는 고착된다. 아무래도 파순은 의심하는 능력, 혹은 의혹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자언은 꿈에서 파순이 담긴 상자를 본 순간 정확히는 몰라도 뭔가 “잘못되고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직감하고, 파순은 상자를 끌어안고 꿈 속을 달리는 자언에게 “같이 가기엔 무거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성이란 그토록 부끄럽고 무겁기에 저항감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파순은 이제 자언의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무의식에 묻어버린 죽음의 실상을 직접 대면하라는 파순의 속삭임은 자언을 공포에 질리게 하지만, 외면당한 진실 스스로 거리를 좁혀오게 내버려둔다면 먹히는 쪽은 자언이 될 거라고 파순은 예언한다. 파순을 제거하지 않는 한 자언은 그 어떤 세계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어떤 진리에도 의탁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파순은 네 보살에게 “진리를 설법하는 여자들을 미치게 하려고” 나타난 귀신이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무릇 두려워하고, 떨치고 싶어하는 불안의 본질은 목적지를 찾을 수 없는 상태이므로. 그러나 정착을 욕망하느라 의혹을 억제할 때, 우리는 곧잘 ‘검증된 길’의 함정에 빠지게도 된다. 다수가 바라보는 곳이 옳은 길이고 그렇지 않은 곳은 틀린 길이라는 착각은 편안한 확신을 줄 테지만, 그 같은 관성에 몸을 맡긴다면 신도 인간처럼, 인간도 귀신처럼,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극락왕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정말로 이 세계의 진실이냐고 반복해서 묻는다. 귀신은 파괴된 여자인가? 신은 이성적인 남자인가? 완결된 진리란 존재하는가? 완전한 우정, 완벽한 연애, 영원한 신앙은 가능한가? 이 작품은 급진적인 질문을 쏟아내면서도 결코 공허한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의 희망이 그 저변을 떠받치고 있는 덕분이다. 자언은 갓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을 처음 발견하는 순수함으로 자신의 위치를 재설정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을 받아들이고, 억지로 이해하려 애썼던 것을 거부하면서 독자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자언은 <극락왕생>에서 말하는 “싸우는 사람”의 기질을 이미 갖추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전부를 해석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용기, 그럼에도 타인과 친밀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낭만이다. 자언이 두 번째 2011년에 새롭게 새긴 감동적인 순간은 다른 존재들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존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거리를 좁히려는 부단한 시도가 있을 때, ‘우리’들이 바꿔 끼운 시간의 책갈피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지만” “끊임없이 상호 간섭하며” 우주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은 오로지 자언의 의지에서 나온다. 그것이 <극락왕생>에서 누구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누구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으며,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거듭되는 이유이리라.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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