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의 무게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원칙이 있다면 아이가 그만하라는 표현을 한 그 즉시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로 간지럼 태우는 장난을 하면서 웃다가도 아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힘들어하거나 괴로워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바로 손을 뗀다.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이 놀이는 그만하고 싶다고 꼭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나에게 유쾌하지 않은 놀이를 시도하면 우리의 ‘그만’이라는 약속에 따라 중지할 것을 요청한다. 나에게는 이 교육이 꽤 중요하다.

너무 많은 어른이 아이들의 호오를, 특히 오를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이일 적에 그렇게 자랐고, 지금도 아이들 주변에 그런 어른들이 포진해 있다. 나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주변 풍경을 관찰해 보면, 심지어 한국 TV를 봐도, 아이들이 보내는 ‘그만’이라는 신호는 너무 쉽게 무시된다. 특히 성인 남성들은 놀라고 겁먹고 억울해하는 아이들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일부러 주지 않고 약올리거나,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보거나 하는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 작은 아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말이다. 어른이 아이를 ‘울리고’ 나서야 웃음을 참으며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 아이를 키우면서 이것이 매우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장면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만’은 어떤 다른 저의도, 우회적 뉘앙스도 없는 스트레이트하고 강력한 구속력이 있는 표현이어야 했다. 내가 아무리 약하더라도, 아니, 내가 약할수록 싫다는 표현이 가진 힘을 믿을 수 있어야 했다. 이 말을 공기 밖에 나오게 만든 상황은 즉시 종료되어야 하며, 이 상황을 발생시킨 사람은 사과해야 한다는 약속은 아주 기본적인 사회의 규칙이었어야 했다. 좋으면서 싫다고 하는 거야, 좋다는 말을 못해서 싫다고 하는 거야. 좋은데 부끄러워서 그만하라고 하는 거야. ‘그만’은 그런 식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됐다. 나는 여성의 -특히 성적 접촉 상황과 관련한- 거절을 향한 무수한, 의도적이거나 진심어린 오독들이 여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아이를 상대로 아이가 원하지 않는 ‘장난’을 즐기면서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도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만’이라는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거나, 나아가 그 말에는 힘이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존중받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 그 아이들 중 누군가는 그만이라는 표현을 무시하는 어른이 될 것이다. 많은 성인 남성이 나의 상급자에게 당한 굴욕은 나의 하급자에게 그대로 갚아주면 상쇄된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들 중 누군가는 그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어른이 될 것이다. 여성 대다수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워야 하는 신호인지 모르고 자라나,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반응이었던 미소나 반문으로 응대하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굴욕을 곱씹으면서 아주 느리게 항의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다. 강자들이 ‘그만’이라는 말 속에 파낸 구멍 때문에 결국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은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어른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 사회적 비용을 최대한 덜 치르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에게 안 되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안 된다. 설사 아이가 괜찮았다고 말할지언정 괜찮지 않은 것은 괜찮지 않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만이라는 말에 힘이 없어서 도무지 어디까지는 그만이 아니고 어디부터가 그만인지조차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에게 분명한 경계선을 만들어 줘야 한다. 그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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