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워 바디〉 : 이 지겹고도 원망스러운 몸

술자리에서 기묘한 표현을 들은 적이 있다. 앞 문장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하튼 몸을 무리하게 쓰거나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거였다. 중요한 건 뒤 문장이다. “몸은 반드시 복수한다”고. 마치 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개체라도 되는 양,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당시 이십 대였던 나는 한 번도 몸을 그런 방식으로 상상해 보지 못했다. 세상에 되는 일 하나 없어도 내 몸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에 우리는 흔히 매료되곤 하니까. 현대 주체에게 허락된 이 유일무이한 통제감을 누리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몸을 조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몸을 파괴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몸은 내 소유’라는 명제와 ‘내 몸은 나에게 복종한다’는 명제를 혼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 몸은 내 것이긴 하지만 그다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실 내 몸은 내 것조차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때때로 몸이 나의 뜻에 따르기는커녕, 나를 구속하고 한계 지음으로써 내가 세상을 만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경계선이라고 느낀다.

.

.

*이 글에는 영화 〈아워 바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워 바디〉 는 이 몸, 나의 의지와 충돌하고 경합하며 때로는 나를 배신하기까지 하는 몸이라는 틀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자영은 만년 공시생 신세를 이제 막 탈출했다. 합격으로써가 아니라, 시험장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괜찮은 학벌이 이력서 첫 줄이자 마지막 줄일 서른 한 살 여자, 의 미래는 한국에서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험에의 의지가 자영을 떠난 순간 자영도 주변인들에게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자영의 원룸에 찾아오던 애인인지 무엇인지 모를 남자는 이별을 선언하고, 시험 포기 통보를 들은 엄마는 자영이 먹던 밥그릇도 빼앗아가 버린다. 소위 현실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발을 동동 구를 상황이지만 자영은 대책 없이 굳건하다. 심지어 그가 선택한 다음 스텝은 진로 변경도, 취업 준비도 아닌, 달리기였다. 육체 활동이라곤 고시생 자취방에서 해치우는 구질구질한 섹스뿐이었을 자영은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현주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현주는 매일 비슷한 시간 비슷한 코스를 달리고 있다. 스포츠 의류 모델 같은 신체, 가볍지만 단련된 동작, 생명이 뿜어져 나오는 숨과 땀, 수년 간 죽은 듯 의자 생활을 했을 자영이 잃어버렸거나 가져본 적 없는 모든 몸이 거기에 있다.

.

.

달리기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혼자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아본다. 형편없다. 현주의 달리기 클럽에 합류한다. 제법 러너로서의 자세를 갖춘다. 변화한 몸에서 희망의 냄새라도 풍기기 시작한 것일까? 친구 민지가 소개한 단순사무 아르바이트는 인턴 채용으로 이어지고, 인턴직에는 정규직 채용의 기회가 열려 있다. 무경력 무스펙 늦깎이 백수 손에 취업이 잡히려 하는데 약간의 멸시와 동정이 대수일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운동하는, 겉보기에는 완벽하게 착실한 라이프스타일을 자영이 보이는 그대로 추구했다면 자영은 희망의 표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영은 도무지 세상을 편안하게 해줄 생각이 없다. 그의 관심은 이십 대 중반 언저리의 취준생 틈바구니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현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쏠려 있다. 우정과 동경과 사랑, 동성 간에 가능한 감정의 스펙트럼 속에서 자영은 열정적으로 현주와의 거리를 좁힌다. 혼자 산다는 것, 술꾼이라는 것, 출판사 직원이라는 것,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리고 현주는 죽는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교통사고였다.

현주가 공모전에서 번번이 탈락한 소설을 보여주려고 용기를 냈을 때, 자영이 술에 취해 잠들지 않았다면 현주는 조금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관객의 추측일 뿐이다. 영화 속 자영은 현주의 슬픔이 무엇이었는지, 진짜 현주가 누구였는지 모른다. 자영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때 그곳에 있었던 현주의 몸 뿐이다. 그래서 자영은 현주의 사라진 몸을 더듬는다. 집안에서는 현주의 몸이 가장 생생하게 기록된 사진을 바라보고 꿈 속에서는 현주의 몸을 불러낸다. 자영은 현주의 사라진 몸을 수행한다. 현주의 달리기 코스를 그대로 따라 뛰고, 현주가 입던 운동복 속에 들어가고, 현주가 경험했던 젊은 남자와의 섹스, 그리고 현주가 꿈꾸던 늙은 남자와의 섹스를 실행한다. 현주가 살아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불가해한 비밀 속으로 가라앉는 자영의 존재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역겹게 한다. 자영은 현주의 욕망을 복제하려 했을 뿐이고, 회사 부장과의 섹스는 정규직 채용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한들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할 것이다. ‘현실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세워놓은 선택지 가운데 그런 답안은 없기 때문이다. 

.

.

광고 영상이나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촉촉하게 젖은 목 위로 포니테일을 흔들면서 달리는 현주를 관음하는 시선은 자영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시선이 자영에게서 현주에게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자영의 눈은 생기가 넘치는 여동생의 몸을 훑고, 여동생은 자영의 다부진 몸을 훔쳐보고, 엄마는 자영의 달릴 수 있는 몸을 부러워하며, 현주는 현주의 몸에 엉겨 붙는 시선을 언짢아 하고, 회사 부장은 자영의 몸에서 활기를 느낀다(자영이 러너 클럽에서 만난 20대 남성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몸에 도취되어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출생, 성장, 질병, 노화, 삶과 죽음, 몸이 쌓아 온 그 수많은 역사들을 조절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기에 몸은 어떤 식으로든 완전한 만족 상태를 비껴 나간다. 자영은 이 몸이라는 구속복을 벗을 수 없어 늘 다른 몸을 상상하고 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한계 너머에 도달해보려 시도한다. 그러나 현주의 몸과 그 몸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전유하려는 자영의 초월적 시도는 기행으로 인식될 뿐이다.  

.

.

사회적으로 아무런 효용도 없는 이 욕망을 최우선 순위에 놓은 자영은 사회에서 처절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내 평판은 최악이고 그중 유일하게 제 편이던 친구 민지마저 치를 떨며 떠났다. 운 좋게 열렸던 취업문도 자영의 손으로 직접 닫아버렸다. 다시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돌아온 자영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호텔의 럭셔리 수트다. 널찍한 호텔에서 하루 종일 먹고 섹스하고 자는 게 꿈이라던 그 자신의 섹스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는 성관계가 아닌 수음을 한다. 현주의 몸이 딛었거나 딛을 예정이었던 트랙을 아는 데까지 완주한 자영은 결국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셈이다. 무진 애를 써도 빠져나갈 수 없는 몸, 온 힘을 다해 뚫고 달려나가려 해도 나를 내가 아는 자리에서 발견하게 하는 이 지겹고도 원망스러운 몸이라는 집으로.

.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Leave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