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남자아이들과 치고 박고 싸우던 ‘골목대장’ 여자아이들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막 2차성징이 시작된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게 가슴을 맞고 돌아와 울곤 했다. 또래에 비해 키와 덩치가 엄청나게 컸던 그 아이, 약간 어눌하지만 여자아이들 앞에 나서서 싸우며 ‘왕언니’를 자처했던 그 애는 더 이상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남자아이들은 그 애의 육중한 몸과 거대한 가슴을 두고 키득거렸다. 머지않아 누군가 그 애를 ‘따먹었’는데 너무 못생기고 뚱뚱해서 엎어놓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초등학교…

괴물이 된 여자들: 만화 속 ‘성형 미인’과 루키즘

‘오크’.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여성들에게 붙은 새 별명이었다. 오크의 ‘크’를 떼어 접미사로 붙이면 놀리기 퍽 좋은 이름을 만들 수 있었다. ‘전여오크’, ‘효크’. 혐오의 타깃이 된 여성은 혹독한 ‘얼평’으로 가중처벌을 받는다. 넌 여자’도’ 아니라는 조롱, 존재 자체가 위협이라는 야유 속에서 여성들은 때려잡아야 할 몬스터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쯤 후에는 새 유형의 몬스터가 업데이트되었다. 이마에 보형물을 넣고, 버선코를 만들고, 눈 밑에 지방을 이식하고, 광대뼈를 깎고 양악수술을 한 ‘성형 괴물’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성형외과를 빠져나오는…

태아보다 임산부: 임산부 취급을 위한 다섯 가지 주의사항

  지하철 선반 위쪽을 올려다보면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세요, 아기가 고마워해요”. 임산부 배려석 벽면에 붙은 커다란 핑크 스티커는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자리’임을 강조한다. 임신 전이었다면 무감각하게 지나쳤을 문장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임산부란 무엇인가? 태아를 앞세우지 않고는 자리 하나도 보전할 수 없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보이는 임산부 관련 캠페인은 찍어낸 듯이 똑같은 전략을 취하고…

〈비밀의 숲〉: K-드라마의 진부한 공식 깨기

*이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성보다 지성   거대 음모나 극악 범죄에 맞서 싸우는 수사물 캐릭터들에게는 명분이 있다. 그들의 가족은 위기에 처했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갚아야 할 심리적 부채가 존재한다. 최근 종영한 OCN 드라마 <듀얼>이나 영화 <테이큰>처럼 납치당한 딸을 인질로 세우면 복잡한 고민 없이 주인공을 싸움터로 내보낼 수 있다. 자력으로 구출할 가능성이 적은 딸이 아들보다 볼모로 적합하다. 어리고, 착하고, 병에 걸린 딸이면 더 좋다. 지루하다. 억지로 증폭시킨 보호자의…

〈옥자〉: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에서 길을 잃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적’이라는 표현을 칭찬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영화에 관해서라면 <국가대표>나 <국제시장>처럼 애국심을 쥐어짜는 ‘국뽕’ 무비나 <신세계> 이후 우후죽순 조류를 형성한 브로맨스 누아르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봉준호는 달랐다. 비이성이 지배하는 음습한 공간을 슬랩스틱이나 ‘찰진’ 욕설 같은 남성적 유머가 가로지른다. 무능한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80년대의 반지성주의가 촌극을 빚는 <살인의 추억>, 소도시의 폐쇄적 분위기와 뒤틀린 모성이 절묘하게 조화하는 <마더>. 밭두렁에서 김상경을 날아 차는 송강호, 한강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박해일, 관광버스에서 넋 나간 춤을 추는…

이효리와 ‘black’: 섹스 심벌의 성애화 탈출기

2005년 당시 스포츠 신문의 이효리 관련 기사 헤드라인 이효리가 스포츠신문 1면을 대서특필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효리보다도 효리 가슴이 주인공이었다고 해야겠다. 이효리 신드롬에는 김완선이나 엄정화 같은 여성 솔로 가수를 소비하던 90년대적 양식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텐미닛’의 대성공을 기점으로 여성의 신체는 조각났다. 공공의 품평 대상이 된 가슴을 누군가는 욕망하고, 가짜 가슴이라 비난도 하였으며, 노골적 성 상품화라고 백안시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효리는 너무도 잘 나갔고, 이후 가요계에는…

불법의 문턱에서: 임신중단은 ‘내 맘’입니다

17주 4일이었다. 17주 4일! 평생 이 충격적인 숫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뒤늦게 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회사 화장실에서 확인한 임신 테스트기에는 두 줄이 선명했다. 점심시간에 산부인과를 찾았다. 아랫배에 차가운 크림을 바르고 초음파 기계가 몇 번 더듬자 조그맣게 옹그린 척추뼈가 스크린에 떠올랐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의사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기는 11센티미터가량, 골격 및 기관이 잘 형성되었으며, 남자아이로 보인다고 했다. 나는 태아를 확인한 순간부터 숨죽이며 울기만 했고 상황을 눈치챈 의사는 주변에…

안녕, ‘완모’ 신화: 분유 수유한 당신, 참 잘했어요

모유수유의 고충   왜 모유수유를 결심했던가? 솔직히 말하면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좋다니까, 그게 전부였다. (호주) 병원에서는 진료를 받을 때마다 나의 수유 계획을 물었고, 모유의 장점을 설명하는 책자들을 안겨주며 모유수유를 푸시했다. 모유는 아기에게 최고의 영양분을 제공한다, 모유가 신생아 면역력을 향상시킨다, 스킨십을 통해 아이와 산모의 유대감이 높아진다, 자궁수축이 촉진되어 산후회복이 빠르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젖병보다 위생적이다, 유방암과 난소암 등 여성질환을 예방한다 등등 모유수유를 예찬론은 끝을 몰랐다. 나는 책장을…

〈덴마〉 8년: 양영순의 여성관은 발전하고 있을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더우먼>과 <악녀>의 극장가 개봉은 참으로 시기적절하다. 여성 감독 패티 젠킨스가 메가폰을 잡고 갤 가돗이 주연한 여성 히어로 영화, 김옥빈이 쌍검과 도끼를 휘두르며 강도 높은 무술 연기를 소화하는 여성 원톱 액션 영화에는 보장되는 수요층이 있다. 바로 여성 관객이다. 주류 영화계는 여성 배우에게 아주 자그마한 자리만을 허락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사랑스러운 히로인으로,…

육아 판타지 버라이어티: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기만

  아이가 생길 거라 상상한 적도 계획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곧잘 다니던 20대 여성 위주의 여초 커뮤니티에서 괴담처럼 소비되던 이야기들, 트럭이 배를 치고 지나가는 고통이라더라, 마취 없이 생살을 째도 모른다더라 하는 ‘카더라’들이 유일한 학습 자료였다. 임신을 발견하고 나서 부랴부랴 경험자들의 후기를 뒤지고 다녔지만, 마음의 준비와 상관없이 분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배고프든 졸리든, 춥든 덥든, 불편하든 심심하든, 하는 일이라고는 혀를 떨며 울어대는 것뿐인 갓난쟁이가 세상에 똑 떨어졌다. 산후조리원의…

왜 애 엄마들은 백화점에서 ‘꿀’을 빨까

한국행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최대 걱정거리는 미세먼지였다. 미세먼지 때문에 5살배기 딸의 피부가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비슷한 증상의 감기를 달고 다닌다, 예정되어 있던 야외 활동을 취소했다, 다른 나라였으면 휴교령 수준이다, 영유아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쏟아지는 말들에 유아용 마스크를 검색하며 근심이 깊어졌다. 아기와 함께하는 첫 장기 여행이었다. 10개월 아기와 타지에서 2주간 외부활동을 하려면 짐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 비상약, 체온계, 아기용 워시 제품, 로션, 발진 크림, 이앓이 젤, 손톱깎이 같은 기본 용품 외에, 매일매일…

이유식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서양식 이유식으로 아기 저체중 극복하기

  갓난쟁이와 온종일 부대끼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들도 도전으로 느껴지는데, 나에게는 속싸개(스와들업) 떼기나 밤중 수유 끊기, 백색소음 없이 재우기 등이 그랬다. 이 ‘핏덩이에서 아기로 이행하는 관문’들을 통과하려면 겨우 적응한 기존의 패턴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식(Baby Led Weaning, BLW)은 그중에서도 가장 긴장되는 과제다. 우유로만 영양분을 섭취해오던 아기에게 사람의 음식을 먹이려면 부지런히 장을 보고 식단도 신경 쓰고 부엌에 더 오래 서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유식…

네 결혼 너나 재밌지: tvN 〈신혼일기〉와 나영석의 매너리즘

클래스는 변한다  ‘유개념 예능’. 국내에서 가장 많은 코어 덕후를 보유한 최장수 예능 <무한도전>의 아이덴티티란 그런 것이었다. 특히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무한도전>은 어떤 심정적 유대의 고리가 되었다. 누군가 <무한도전>의 팬이라고 하면 최소한 ‘그쪽’은 아닐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진보진영의 정부 비판적 스탠스를 해학으로 버무려내는 배짱을 가진 김태호 PD의 공이었다. <무한도전>은 <무모한 도전>을 계승한 유사-삼류적 예능감과 <느낌표!> 시절…

빠순이에서 덕후로, 덕후에서 메타-덕질로 (2): 자유롭게 팬질 할 권리

벌집을 건드린 것이다. 지난 글 ‘빠순이에서 덕후로, 덕후에서 ‘메타-덕질’: 우리 시대의 주체적 덕질은 가능한가(링크)’ 이야기다. 개인 블로그에 글을 업로드하고 머지않아 젝스키스(이하 젝키) 팬들의 항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운이 느껴졌다. 댓글 작성 권  한을 회원 전용으로 변경했다. 일부 젝키 팬들은 댓글을 달기 위해 블로그 서비스에 가입하기도 했다. 딴지일보에 원고가 올라간 익일에는 담당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일부 팬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