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3): 웹툰 〈남의 부인〉, 그 남자의 진짜 파트너는 누구인가

나만 바라봐 ‘친구 없는 남자’.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으로 친구 없는 남자를 꼽는 여자들을 왕왕 본 적 있다. 낮은 술자리 빈도, 퇴근하면 칼 같이 귀가, 괜히 바람이나 넣는 허풍선이들 차단, 나를 남자들 친목 모임에 끌고 나갈 일도 없는, 그토록 ‘가정적인’ 남자와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수월할 거라고 말이다. 여자들은 남자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한 덩어리로 반죽하는 꿈을 꾸는…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2): 〈유전〉, 가부장제 컬트

* 이 글에는 영화 〈유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재현할 수 없는 것 애니(토니 콜레트 분)는 아들 피터가 못미덥다. 친구네 하우스 파티에 다녀오겠다고 차를 빌려 달란다. 피터가 술을 마실 것 같다고 걱정하던 애니는 찰리를 딸려 보낸다. 챙겨야 할 여동생이 있으면 나을까 싶었다. 하지만 열 여섯 피터는 너무 어리다. 그는 기어코 찰리를 떼어 놓는다. 열 세 살 찰리는…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1): 〈툴리〉, 육아 외주 공포

셋째가 제일 쉽다고? 영화 〈툴리〉의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기진맥진하다. 윤기 없이 마른 금발은 세어버린 백발처럼 보이고, 충혈된 눈자위에 눈동자마저 빛 바랜 듯 엷은 하늘색을 띤다. 후 불면 재가 되어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마를로는 출산을 앞두고 있다. 계획하지 않은 아이였다. 그는 이미 딸 사라와 아들 조나를 등교시키는 아침마다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춘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0): 들어가며

  얼마 전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를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72년에 가족사회학자 제시 버나드가 했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결혼은 여성의 건강에 유해할 수 있다.” (…) 이런 연구에서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보다 우울증이 20퍼센트 더 많이 발병하고 중증 신경증은 세 배 더 많이 나타낸다. 신경쇠약, 신경과민, 심계항진, 무력감도 기혼 여성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

「어제가 오면(See You Yesterday)」의 결말이 열려야 하는 이유

  지난 달엔가, 트위터에서 우연히 본 영상을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미국 쇼핑몰 주차장에서 행인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장면이었다. 경찰은 든 것을 모두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총성이 터질 것 같은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상대편에서는 한 흑인 여성의 절규가 들려왔다. 아이를 안고 있다고 말이다. 경찰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같은 명령을…

여성의 아동화, 아동의 여성화, 아동-여성이라는 새로운 신체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내가 키워진 방식을 떠올리면서, 날로 실감하는 것이 있다. 여성혐오와 아동혐오는 닮았다. 그러니까,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성인이 아동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남자들이 종종 여성의 부정을 긍정의 회피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어떤 어른들은 아동의 거부 의사를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는다. 아이가 씩씩대고 울 때까지 약을 올리는 어른들의 즐거운 얼굴은 나를…

빻은 유아동 콘텐츠에 지친 당신을 위한 그림책 추천

  며칠 전 케이마트(호주의 대형 잡화 마트)를 배회하다가 이상한 물건을 봤다. 「여자는 방귀 안 껴, 알겠니!!(Girls Don’t Fart Okay!!)」라는 어린이용 그림책이었다. 불길한 직감에 이끌리며 책을 후루룩 살펴봤다. 주인공은 남자아이다. 그 앞에 여자 요정이 나타나 “여자는 방귀를 끼지 않는다”고 우긴다. “여자의 몸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주인공은 그의 동성 친구들과 함께 사실 여부를 확인하러 떠난다. 여러가지…

사라져야 사는 여자들(1): 사건의 재구성

  연애하며 작아지기 남자들이 잘난 여자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나는 연애라는 친밀한 관계를 통해 본심을 엿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시 나에겐 서울 소재의 대학생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타이틀도 없었는데, 나와의 학력 차이가 큰 남자들은 나의 존재를 도저히 못견뎌하는 듯 했다. 세상에는 (비꼬는 의미로) “가방끈 길어서 좋겠다”, “너는 네가 잘난 줄 알지”, “네가 하는 공부는 쓰레기고…

여자의 유통기한에 관하여: 아재와 미소녀의 불유쾌한 만남

와인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유우-머에 그렇게들 박수를 쳐댔더랬다. 여자가 불티나게 팔리는 나이는 스물 셋 넷, 제값을 받을 수 있는 마지노선은 스물다섯, 스물여섯은 땡처리, 스물일곱부터는 폐기처분이라는 뜻이었다. 서른이면 ‘상폐녀(상장폐지녀)’라고도 했다. 대중 일반의 공감을 등에 업고 포장지만 바꿔가며 신나게 유포되어 온 메시지 “팔릴 때 좋은 남자 잡아라(시집가라)”는 농담을 가장한 브레인워싱이었다.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들자 누가…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남자아이들과 치고 박고 싸우던 ‘골목대장’ 여자아이들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막 2차성징이 시작된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게 가슴을 맞고 돌아와 울곤 했다. 또래에 비해 키와 덩치가 엄청나게 컸던 그 아이, 약간 어눌하지만 여자아이들 앞에 나서서 싸우며 ‘왕언니’를 자처했던 그 애는 더 이상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남자아이들은 그 애의 육중한 몸과 거대한 가슴을 두고 키득거렸다. 머지않아 누군가 그 애를 ‘따먹었’는데 너무 못생기고 뚱뚱해서 엎어놓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초등학교…

괴물이 된 여자들: 만화 속 ‘성형 미인’과 루키즘

‘오크’.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여성들에게 붙은 새 별명이었다. 오크의 ‘크’를 떼어 접미사로 붙이면 놀리기 퍽 좋은 이름을 만들 수 있었다. ‘전여오크’, ‘효크’. 혐오의 타깃이 된 여성은 혹독한 ‘얼평’으로 가중처벌을 받는다. 넌 여자’도’ 아니라는 조롱, 존재 자체가 위협이라는 야유 속에서 여성들은 때려잡아야 할 몬스터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쯤 후에는 새 유형의 몬스터가 업데이트되었다. 이마에 보형물을 넣고, 버선코를 만들고, 눈 밑에 지방을 이식하고, 광대뼈를 깎고 양악수술을 한 ‘성형 괴물’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성형외과를 빠져나오는…

태아보다 임산부: 임산부 취급을 위한 다섯 가지 주의사항

  지하철 선반 위쪽을 올려다보면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세요, 아기가 고마워해요”. 임산부 배려석 벽면에 붙은 커다란 핑크 스티커는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자리’임을 강조한다. 임신 전이었다면 무감각하게 지나쳤을 문장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임산부란 무엇인가? 태아를 앞세우지 않고는 자리 하나도 보전할 수 없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보이는 임산부 관련 캠페인은 찍어낸 듯이 똑같은 전략을 취하고…

<비밀의 숲>: K-드라마의 진부한 공식 깨기

*이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성보다 지성   거대 음모나 극악 범죄에 맞서 싸우는 수사물 캐릭터들에게는 명분이 있다. 그들의 가족은 위기에 처했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갚아야 할 심리적 부채가 존재한다. 최근 종영한 OCN 드라마 <듀얼>이나 영화 <테이큰>처럼 납치당한 딸을 인질로 세우면 복잡한 고민 없이 주인공을 싸움터로 내보낼 수 있다. 자력으로 구출할 가능성이 적은 딸이 아들보다 볼모로 적합하다. 어리고, 착하고, 병에 걸린 딸이면 더 좋다. 지루하다. 억지로 증폭시킨 보호자의…

<옥자>: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에서 길을 잃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적’이라는 표현을 칭찬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영화에 관해서라면 <국가대표>나 <국제시장>처럼 애국심을 쥐어짜는 ‘국뽕’ 무비나 <신세계> 이후 우후죽순 조류를 형성한 브로맨스 누아르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봉준호는 달랐다. 비이성이 지배하는 음습한 공간을 슬랩스틱이나 ‘찰진’ 욕설 같은 남성적 유머가 가로지른다. 무능한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80년대의 반지성주의가 촌극을 빚는 <살인의 추억>, 소도시의 폐쇄적 분위기와 뒤틀린 모성이 절묘하게 조화하는 <마더>. 밭두렁에서 김상경을 날아 차는 송강호, 한강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박해일, 관광버스에서 넋 나간 춤을 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