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와 ‘black’: 섹스 심벌의 성애화 탈출기

2005년 당시 스포츠 신문의 이효리 관련 기사 헤드라인 이효리가 스포츠신문 1면을 대서특필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효리보다도 효리 가슴이 주인공이었다고 해야겠다. 이효리 신드롬에는 김완선이나 엄정화 같은 여성 솔로 가수를 소비하던 90년대적 양식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텐미닛’의 대성공을 기점으로 여성의 신체는 조각났다. 공공의 품평 대상이 된 가슴을 누군가는 욕망하고, 가짜 가슴이라 비난도 하였으며, 노골적 성 상품화라고 백안시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효리는 너무도 잘 나갔고, 이후 가요계에는…

불법의 문턱에서: 임신중단은 ‘내 맘’입니다

17주 4일이었다. 17주 4일! 평생 이 충격적인 숫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뒤늦게 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회사 화장실에서 확인한 임신 테스트기에는 두 줄이 선명했다. 점심시간에 산부인과를 찾았다. 아랫배에 차가운 크림을 바르고 초음파 기계가 몇 번 더듬자 조그맣게 옹그린 척추뼈가 스크린에 떠올랐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의사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기는 11센티미터가량, 골격 및 기관이 잘 형성되었으며, 남자아이로 보인다고 했다. 나는 태아를 확인한 순간부터 숨죽이며 울기만 했고 상황을 눈치챈 의사는 주변에…

안녕, ‘완모’ 신화: 분유 수유한 당신, 참 잘했어요

모유수유의 고충   왜 모유수유를 결심했던가? 솔직히 말하면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좋다니까, 그게 전부였다. (호주) 병원에서는 진료를 받을 때마다 나의 수유 계획을 물었고, 모유의 장점을 설명하는 책자들을 안겨주며 모유수유를 푸시했다. 모유는 아기에게 최고의 영양분을 제공한다, 모유가 신생아 면역력을 향상시킨다, 스킨십을 통해 아이와 산모의 유대감이 높아진다, 자궁수축이 촉진되어 산후회복이 빠르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젖병보다 위생적이다, 유방암과 난소암 등 여성질환을 예방한다 등등 모유수유를 예찬론은 끝을 몰랐다. 나는 책장을…

<덴마> 8년: 양영순의 여성관은 발전하고 있을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더우먼>과 <악녀>의 극장가 개봉은 참으로 시기적절하다. 여성 감독 패티 젠킨스가 메가폰을 잡고 갤 가돗이 주연한 여성 히어로 영화, 김옥빈이 쌍검과 도끼를 휘두르며 강도 높은 무술 연기를 소화하는 여성 원톱 액션 영화에는 보장되는 수요층이 있다. 바로 여성 관객이다. 주류 영화계는 여성 배우에게 아주 자그마한 자리만을 허락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사랑스러운 히로인으로,…

육아 판타지 버라이어티: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기만

  아이가 생길 거라 상상한 적도 계획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곧잘 다니던 20대 여성 위주의 여초 커뮤니티에서 괴담처럼 소비되던 이야기들, 트럭이 배를 치고 지나가는 고통이라더라, 마취 없이 생살을 째도 모른다더라 하는 ‘카더라’들이 유일한 학습 자료였다. 임신을 발견하고 나서 부랴부랴 경험자들의 후기를 뒤지고 다녔지만, 마음의 준비와 상관없이 분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배고프든 졸리든, 춥든 덥든, 불편하든 심심하든, 하는 일이라고는 혀를 떨며 울어대는 것뿐인 갓난쟁이가 세상에 똑 떨어졌다. 산후조리원의…

왜 애 엄마들은 백화점에서 ‘꿀’을 빨까

한국행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최대 걱정거리는 미세먼지였다. 미세먼지 때문에 5살배기 딸의 피부가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비슷한 증상의 감기를 달고 다닌다, 예정되어 있던 야외 활동을 취소했다, 다른 나라였으면 휴교령 수준이다, 영유아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쏟아지는 말들에 유아용 마스크를 검색하며 근심이 깊어졌다. 아기와 함께하는 첫 장기 여행이었다. 10개월 아기와 타지에서 2주간 외부활동을 하려면 짐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 비상약, 체온계, 아기용 워시 제품, 로션, 발진 크림, 이앓이 젤, 손톱깎이 같은 기본 용품 외에, 매일매일…

이유식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서양식 이유식으로 아기 저체중 극복하기

  갓난쟁이와 온종일 부대끼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들도 도전으로 느껴지는데, 나에게는 속싸개(스와들업) 떼기나 밤중 수유 끊기, 백색소음 없이 재우기 등이 그랬다. 이 ‘핏덩이에서 아기로 이행하는 관문’들을 통과하려면 겨우 적응한 기존의 패턴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식(Baby Led Weaning, BLW)은 그중에서도 가장 긴장되는 과제다. 우유로만 영양분을 섭취해오던 아기에게 사람의 음식을 먹이려면 부지런히 장을 보고 식단도 신경 쓰고 부엌에 더 오래 서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유식…

네 결혼 너나 재밌지: tvN <신혼일기>와 나영석의 매너리즘

클래스는 변한다  ‘유개념 예능’. 국내에서 가장 많은 코어 덕후를 보유한 최장수 예능 <무한도전>의 아이덴티티란 그런 것이었다. 특히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무한도전>은 어떤 심정적 유대의 고리가 되었다. 누군가 <무한도전>의 팬이라고 하면 최소한 ‘그쪽’은 아닐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진보진영의 정부 비판적 스탠스를 해학으로 버무려내는 배짱을 가진 김태호 PD의 공이었다. <무한도전>은 <무모한 도전>을 계승한 유사-삼류적 예능감과 <느낌표!> 시절…

빠순이에서 덕후로, 덕후에서 메타-덕질로 (2): 자유롭게 팬질 할 권리

벌집을 건드린 것이다. 지난 글 ‘빠순이에서 덕후로, 덕후에서 ‘메타-덕질’: 우리 시대의 주체적 덕질은 가능한가(링크)’ 이야기다. 개인 블로그에 글을 업로드하고 머지않아 젝스키스(이하 젝키) 팬들의 항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운이 느껴졌다. 댓글 작성 권  한을 회원 전용으로 변경했다. 일부 젝키 팬들은 댓글을 달기 위해 블로그 서비스에 가입하기도 했다. 딴지일보에 원고가 올라간 익일에는 담당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일부 팬들이…

빠순이에서 덕후로, 덕후에서 메타-덕질로 (1): 우리 시대의 메타-덕질은 성공할까

빠순이와 오리지널 씬   벌써 이십 년이 다 돼가는 이야기지만, 1세대 아이돌 팬덤이 출현하던 20세기 말 ‘빠순이’라는 호칭은 아주 모욕적인 용법으로 쓰였다. 당시 피시통신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리스너들은 표절, 립싱크, 음악성 등을 빌미로 아이돌을 대차게 비판하면서 ‘수준 떨어지는 오빠’를 추앙하는 여성 팬들에게는 ‘빠순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매춘 여성을 지칭하는 비속어에서 파생됐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어원은 둘째 치더라도, ‘빠순이’라는 말에는 십 대 여성팬을 한 데…

김정숙 씨가 놓친 네 가지

‘삼포세대’라는 말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 2011년이었다. 6년 간 삶은 더 어려워진 듯하다. ‘우리는 왜 연애/결혼/출산을 하지 못하는가?’라는 신세 한탄은 ‘우리가 왜 연애/결혼/출산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정말로 연애/결혼/출산을 원하는가? 이전에는 조건이 따라주지 않아 우러러만 보던 삶의 목표들이 강요된 가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확산되면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시작했다. 그래서 2017년의 이삼십대는 포기보다 ‘거부’가 어울리는 세대가 됐다. 애초에 추구하지 않는 바를 포기할 수는 없는…

산이는 왜 박근혜를 ‘나쁜 년’이라고 불러야 했나

‘티나’였을 것이다. 한국 힙한 씬에 최초로 등장한 팜므파탈의 원형, 남자 지갑에 빨대 꽂고 꿀 빨면서 뒤에서는 오입질로 뒤통수치는 남성들의 적. 그 한국형-된장녀형 악녀의 기원을 찾으려면 브라운아이드소울 1집 <Soul Free>(2003)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CB Mass에서 막 손 털고 나온 최자와 개코가 피쳐링한 곡 ‘Candy’에 등장하는 티나 얘기다. 악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최자와 친구를 만류하는 개코의…

걸그룹의 표정 / 소녀형 그룹 양산 러쉬에 부쳐

  신드롬이었다. 하이 포니테일을 틀어올린 안소희가 고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두처럼 빵빵한 볼을 가리며 ‘어머나’ 다시 한 번 말해보라던 순간, 원더걸스의 ‘텔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소희는 초대 국민 여동생 문근영(<어린신부>)의 왕관을 이어받았다. 모르는 사람도 없겠지만 가수로서의 소희는 절망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작은 성량, 불안한 음정, 음이탈도 예사였다. 근데 뭐, 어쩌라고? ‘어머나’ 하나만 야무지게 보여주면 그만이다.…

무뎌진다는 것

아기가 생긴 뒤 내가 살던 우주는 급격히 수축했다. 개인이 가진 재능이나 유망함과는 관계 없이, 어머니가 된 여자들의 이름은 적어도 일 년 간 사회에서 사라진다. 행동 반경은 몇십 평 이내의 실내 공간으로 줄어들고, 일상생활은 아기가 자고 먹는 시간을 축으로 삼아 쳇바퀴를 돈다. 하루 중 가장 오래 대화하는 상대는 간헐적으로 아, 우 정도의 옹알이밖에 할 줄 모르는 아기이고, 세상사는 TV나 인터넷, 남편, 가족, 친구의 입을 통해 제한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출산 후 제대로 외출하기는 처음이었던 지난 주말, 이전에는 한번도 와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