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1): 〈툴리〉, 육아 외주 공포

셋째가 제일 쉽다고? 영화 〈툴리〉의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기진맥진하다. 윤기 없이 마른 금발은 세어버린 백발처럼 보이고, 충혈된 눈자위에 눈동자마저 빛 바랜 듯 엷은 하늘색을 띤다. 후 불면 재가 되어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마를로는 출산을 앞두고 있다. 계획하지 않은 아이였다. 그는 이미 딸 사라와 아들 조나를 등교시키는 아침마다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춘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0): 들어가며

  얼마 전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를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72년에 가족사회학자 제시 버나드가 했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결혼은 여성의 건강에 유해할 수 있다.” (…) 이런 연구에서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보다 우울증이 20퍼센트 더 많이 발병하고 중증 신경증은 세 배 더 많이 나타낸다. 신경쇠약, 신경과민, 심계항진, 무력감도 기혼 여성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

빻은 유아동 콘텐츠에 지친 당신을 위한 그림책 추천

  며칠 전 케이마트(호주의 대형 잡화 마트)를 배회하다가 이상한 물건을 봤다. 「여자는 방귀 안 껴, 알겠니!!(Girls Don’t Fart Okay!!)」라는 어린이용 그림책이었다. 불길한 직감에 이끌리며 책을 후루룩 살펴봤다. 주인공은 남자아이다. 그 앞에 여자 요정이 나타나 “여자는 방귀를 끼지 않는다”고 우긴다. “여자의 몸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주인공은 그의 동성 친구들과 함께 사실 여부를 확인하러 떠난다. 여러가지…

태아보다 임산부: 임산부 취급을 위한 다섯 가지 주의사항

  지하철 선반 위쪽을 올려다보면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세요, 아기가 고마워해요”. 임산부 배려석 벽면에 붙은 커다란 핑크 스티커는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자리’임을 강조한다. 임신 전이었다면 무감각하게 지나쳤을 문장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임산부란 무엇인가? 태아를 앞세우지 않고는 자리 하나도 보전할 수 없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보이는 임산부 관련 캠페인은 찍어낸 듯이 똑같은 전략을 취하고…

안녕, ‘완모’ 신화: 분유 수유한 당신, 참 잘했어요

모유수유의 고충   왜 모유수유를 결심했던가? 솔직히 말하면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좋다니까, 그게 전부였다. (호주) 병원에서는 진료를 받을 때마다 나의 수유 계획을 물었고, 모유의 장점을 설명하는 책자들을 안겨주며 모유수유를 푸시했다. 모유는 아기에게 최고의 영양분을 제공한다, 모유가 신생아 면역력을 향상시킨다, 스킨십을 통해 아이와 산모의 유대감이 높아진다, 자궁수축이 촉진되어 산후회복이 빠르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젖병보다 위생적이다, 유방암과 난소암 등 여성질환을 예방한다 등등 모유수유를 예찬론은 끝을 몰랐다. 나는 책장을…

육아 판타지 버라이어티: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기만

  아이가 생길 거라 상상한 적도 계획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곧잘 다니던 20대 여성 위주의 여초 커뮤니티에서 괴담처럼 소비되던 이야기들, 트럭이 배를 치고 지나가는 고통이라더라, 마취 없이 생살을 째도 모른다더라 하는 ‘카더라’들이 유일한 학습 자료였다. 임신을 발견하고 나서 부랴부랴 경험자들의 후기를 뒤지고 다녔지만, 마음의 준비와 상관없이 분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배고프든 졸리든, 춥든 덥든, 불편하든 심심하든, 하는 일이라고는 혀를 떨며 울어대는 것뿐인 갓난쟁이가 세상에 똑 떨어졌다. 산후조리원의…

왜 애 엄마들은 백화점에서 ‘꿀’을 빨까

한국행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최대 걱정거리는 미세먼지였다. 미세먼지 때문에 5살배기 딸의 피부가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비슷한 증상의 감기를 달고 다닌다, 예정되어 있던 야외 활동을 취소했다, 다른 나라였으면 휴교령 수준이다, 영유아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쏟아지는 말들에 유아용 마스크를 검색하며 근심이 깊어졌다. 아기와 함께하는 첫 장기 여행이었다. 10개월 아기와 타지에서 2주간 외부활동을 하려면 짐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 비상약, 체온계, 아기용 워시 제품, 로션, 발진 크림, 이앓이 젤, 손톱깎이 같은 기본 용품 외에, 매일매일…

이유식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서양식 이유식으로 아기 저체중 극복하기

  갓난쟁이와 온종일 부대끼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들도 도전으로 느껴지는데, 나에게는 속싸개(스와들업) 떼기나 밤중 수유 끊기, 백색소음 없이 재우기 등이 그랬다. 이 ‘핏덩이에서 아기로 이행하는 관문’들을 통과하려면 겨우 적응한 기존의 패턴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식(Baby Led Weaning, BLW)은 그중에서도 가장 긴장되는 과제다. 우유로만 영양분을 섭취해오던 아기에게 사람의 음식을 먹이려면 부지런히 장을 보고 식단도 신경 쓰고 부엌에 더 오래 서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유식…

김정숙 씨가 놓친 네 가지

‘삼포세대’라는 말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 2011년이었다. 6년 간 삶은 더 어려워진 듯하다. ‘우리는 왜 연애/결혼/출산을 하지 못하는가?’라는 신세 한탄은 ‘우리가 왜 연애/결혼/출산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정말로 연애/결혼/출산을 원하는가? 이전에는 조건이 따라주지 않아 우러러만 보던 삶의 목표들이 강요된 가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확산되면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시작했다. 그래서 2017년의 이삼십대는 포기보다 ‘거부’가 어울리는 세대가 됐다. 애초에 추구하지 않는 바를 포기할 수는 없는…

아기 예찬

  개, 고양이, 심지어 조류나 설치류까지도, 모든 동물은 아기일 때 가장 예쁘고 귀엽지만, 그중에서도 인간 아기는 정말로 대단하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는 싱그러운 생명의 냄새가 난다. 아기를 품에 안고 있으면 머리통을 덮고 있는 배냇머리가 가는 해초처럼 피부를 간질인다. 우유 외에 다른 음식을 접해본 적 없는 입에서는 달큰한 숨이 뿜어져 나온다. 아직 작고 여린 성대로 옹알이를 하면…

헬육아의 꽃

은 모유수유다. 농담이 아니라 모유수유야말로 전쟁이다. 한 달 사이 모유수유를 포기할까 수십 번도 더 고민했다. 아기에게 최고의 영양분을 제공하고 모자간 애착 형성을 돕는다지만, 내 정신과 육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모유를 고집해야 하는가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모유수유가 최고라고 부르짖기에, 나는 출산이 끝나면 모체에서 물흐르듯 모유가 샘솟아 나오고 아기는 본능에 따라 가슴에 매달려 우유를 받아먹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모유수유는 자연의 섭리라기엔 너무나도, 곤욕스럽다. 모유수유를 자리잡게 만들기 위해서는 -모유수는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젖을 뚫어야 하고, 젖 양을 늘려야 하고, 엄마는 수유 자세를 연습해야…

누구 좋으라고 하는 황혼 육아인가

며칠 전 한국일보에서 출산 후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쓴 에세이를 읽었다. 이런 주제의 글을 즐겨 보는 성미도 아니거니와 헤드라인이 기깔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클릭한 이유는 순전히 일러스트 때문이었다. 일러스트에는 엄마를 찾는 갓난쟁이와 단 둘이 남겨진 할머니, 그리고 그 뒤편으로 핸드백을 들고 도망치듯 대문을 나서는 딸이 그러져 있었다. 도대체 본문의 요지가 무엇이기에 이런 삽화를 뽑았나 궁금해졌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많은 여성이 출산을 기점으로 어머니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되면서 모녀관계가 재정립되는데,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오랫동안 데면데면한 관계를…